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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May 15. 2024

꿈 단상 다섯


(1)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니, 순우리말로는 아마 ‘가위’에 해당할 ‘나쁜(혹은 무서운, 또는 불길한) 꿈’과 관련해 다음 세 가지 단어가 나온다. 그 설명의 강도(?)에 따라 나열해 보면, 이렇게 될 것 같다. 근데 아무래도 자의적인 것 같아 수긍하기 좀 그렇다.


흉몽(凶夢) : 불길한 꿈.

악몽(惡夢) : 불길하고 무서운 꿈.

염몽(厭夢) : 불길한 꿈, 또는 가위눌리는 악몽.


《오주연문장전산고》 〈꿈에 대한 변증설〉을 보니, 여섯 가지 꿈이 나열되어 있다. 정몽(正夢), 악몽(噩夢), 사몽(思夢), 오몽(寤夢), 희몽(喜夢), 구몽(懼夢)이다. 《주례》를 인용한 것인데, 그 주석은 이렇다. “‘정몽’은 촉동(觸動)하는 바가 없어 편안하게 꾸는 꿈을 이른다. ‘악몽’은 깜짝 놀라서 꾸는 꿈을 이른다. ‘사몽’은 깨어 있을 때 생각했던 것을 꾸는 꿈을 이른다. ‘오몽’은 깨어 있을 때 말했던 것을 꾸는 꿈을 이른다. ‘희몽’은 기뻐서 꾸는 꿈을 이른다. ‘구몽’은 두려워서 꾸는 꿈을 이른다.”


오주 이규경(李圭景, 1788~?)의 말을 새겨본다. “환이란 것은 깨어 있을 때의 꿈이요, 꿈이란 것은 잠들었을 때의 환이다.(幻也者, 覺時之夢也, 夢也者 睡中之幻也.)”


(2) 꿈에서 벗어나려니 “꿈길 밖에 길이 없어”라고 노래한 황진이의 칠언절구 <상사몽(相思夢)>이 생각난다.


상사상견지빙몽(相思相見只憑夢)

농방환시환방농(儂訪歡時歡訪儂)

원사요요타야몽(願使遙遙他夜夢)

일시동작로중봉(一時同作路中逢)


이 시는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의 번역과 거기에 김성태가 곡을 입힌 가곡 <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안서와 김성태의 또 다른 합작으로 설도의 한시를 읊고 노래한 <동심초>가 있다. 안서는 처음에는 이렇게 번역을 했다.


꿈길밖에 길 없는 우리의 신세(身勢)

임 찾으니 그 임은 날 찾았고야.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路中)서 만나를지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시는 그 후에 이렇게 고친 것이다.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3) 라캉을 어설프게 읽을 때의 기억이다. 그러므로 정확한지 아닌지 확언할 수 없다. 그냥 꿈 같은 이야기다.


라캉에 따르면, 꿈이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자 애쓴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는 꿈속에서만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그 실재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재계’는 꿈이고, 현실은 꿈이 무서워서 화들짝 놀라 깨어 마주하는 환상이다.


이에 비해 나는 장자의 <호접몽>과 <금강경>에 근거한 <구운몽>의 이른바 ‘대각(大覺)’ 장면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어는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꿈이 아니냐?!” 물론 허접한 비교일 것이다.


(4) 김수영운 <달밤>에서 서른 아홉에 서슴없이 꿈을 버리게 되었다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밤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고

착잡한 머리에 책을 집어들 필요가 없고

마지막으로 夢想을 거듭하기도 피곤해진 밤에는

시골에 사는 나는 ―

달 밝은 밤을

언제부터인지 잠을 빨리 자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

나는 커단 서른 아홉 살의 중턱에 서서

서슴지 않고 꿈을 버린다


피로를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슬픈 일이다

밤이여 밤이여 피로한 밤이여

(1959)


(5)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의 〈꿈에 대하여〔夢說〕〉를 읽어 보았다. 대단히 공감할 내용이다. 공감을 넘어 큰 위안이 된다.


“평소에는 사람의 동정(動靜)과 범절이 각각 자신의 성품을 따라서 일정한 양상을 보이지만, 잠이 들면 몽롱해지고 잠잠해져서 몸은 여기에 있더라도 정신은 나가 노닐게 된다. 그리하여 아득한 잠깐 사이에 정신은 가고 싶은 대로 가고 변하고 싶은 대로 변하는데, 비유하면 고목에 벗어놓은 매미 허물처럼, 창공에 노니는 거미줄처럼 방소(方所)도 없고 고금도 없고 생사도 없어서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 흐릿하고 변화하는 때에 이치에 맞는 일도 있고 맞지 않는 일도 있어서, 마구 뒤섞여 앞뒤 순서가 없을 때도 있고 기이하여 정상적인 모습과 반대일 때도 있으며, 간혹가다 윤리에 벗어나고 의리에 위배되며 극악무도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다면 수레를 타고 쥐구멍에 들어가거나, 양념 가루를 빻으면서 쇠 절굿공이를 먹는 꿈 또한 반드시 있을 수 없는 일만도 아니다. 이 때문에 잠에서 깨었을 때 분명하게 기억하는 경우도 있고, 반만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완전히 망각하는 경우도 있고, 꿈을 꾸었는데 또 꾸는 경우도 있는 것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여 징조를 삼을 수 있겠는가.


죄수가 석방되는 꿈을 꾸고 병자가 낫는 꿈을 꾸며, 배고픔에 침을 흘리는 사람이 배부르게 먹는 꿈을 꾸고, 타지에 오랫동안 나와 있는 객이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꾸는 것은 바로 그의 절실한 바람이 잠잘 때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낮에는 남의 종이지만 밤에는 임금으로서의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고, 병이 들어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꿈에서는 상제가 사는 하늘에 올라가 아름다운 음악과 춤을 즐기기도 하며, 한단(邯鄲)의 꿈과 괴안(槐安)의 꿈이 있고, 추구(芻狗)의 꿈과 관분(棺糞)의 꿈이 있다. 그리하여 분분히 어지럽게 나와 손가락을 다 꼽을 수도 없으니, 이는 과연 원인인가, 생각인가? 현실인가, 꿈인가? 현실을 꿈으로 여기는 것인가, 꿈을 현실로 여기는 것인가? 훨훨 날아다닌 것은 나비인가, 유연히 홀로 즐기는 사람은 장주(莊周)인가? 땔나무로 사슴을 덮어둔 곳을 잊어버리고 사사(士師)에게 송사를 벌인 것은 모두 꿈이란 말인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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