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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May 26. 2024

한시 해석

   

좋은 비 시절을 알아 / 好雨知時節

봄이 되니 곧 내리기 시작한다 / 當春乃發生

바람 따라 밤에 몰래 스며들어 / 隨風潛入夜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신다 / 潤物細無聲

들판 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 野徑雲俱黑

강 위에 뜬 배의 불만이 밝다 / 江船火獨明

새벽녘 분홍빛 비에 적은 곳 보니 / 曉看紅濕處

금관성에 꽃들 활짝 피었네 / 花重錦官城     


두보의 유명한 <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시다. 이렇게 번역한 이는 이병한 교수다. 그는 제목을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로 번역한 바 있다. 험잡기 같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내리는’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시방 시에서 화자는 새벽녘에 일어나 밤새 내린 비에 젖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 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견해가 제출된 바 있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니 만물이 생기를 얻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 것으로 농민의 마음을 대신한 것이라는 설과, 때맞춰 내린 금관성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날 것이니 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향락적인 기대감을 적은 것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어찌 별개의 견해이겠는가. 며찰 전 작고한 고 신경림 시인이 노래한 대로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말이다.     


여하튼 이 시는 ‘밤-새벽, 들-강’이라는 공간, ‘어둡고 밝은’ 색체의 대비를 전면에 내세워 ‘기쁨[喜]’을 묘사하고 있는데, 기분이 경박하게 달떠 있지 않고 차분해서 좋다. “어젯밤 송당에 비 내려 / 배갯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 세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昨夜松堂雨, 溪聲一枕西, 平明看庭樹, 宿鳥未離棲)”라고 한 고조기(高兆基)의 <산장야우(山莊夜雨)>의 분위기와 닮아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다른 곳은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겠는데, 마지막 두 구절이 어렵다. “금관성에 꽃들 활짝 피었네”의 원문은 ‘화중금관성(花重錦官城)’이다. ‘금관성’을 빼면 ‘화중’만 남는다. ‘꽃들 활짝 피었네’는 사실 조선 초 두보의 시를 국가에서 번역할 때 이미 “고지 해 폣도다”라고 번역한 바 있다. 여기서 ‘해’는 ‘많이’라는 뜻의 고어다. 그러므로 이 부분 번역의 저작권은 두시언해에 참여한 옛 문인학자들에게 있다. 이 부분을 황동규는 “꽃이 금관성을 짓누르다”라고 해석했다고 한다. 역시 시인다운 상상력이다. ‘활짝’이나 ‘많이’가 지닌  육체적이고 물량적인 해석과는 다른 층위다. 그러나 너무 앞서 간 것은 아닐까?     


‘화중’은 글자 그대로 ‘꽃이 무겁다’는 뜻이다. 밤새 비를 견뎌냈을 터이니 가냘픈 꽃이 무거워 고개 숙일 만하다. 실제 ‘화중’은 큰 사전을 보면, “비를 흠뻑 머금은 꽃”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축자 해석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밤새 비 맞아 고개 숙였다고 슬프다느니 애처롭다느니 하는 식의 촌스러운 상상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고조기의 “자던 새 둥지를 뜨지 않았네”의 정서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새들은 밤새 내린 봄비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었다고 하면 너무 작위적인가?     


달리 볼 길은 없을까? 이렇게 답답할 때는 상식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좋다. ‘중(重)’은 무겁기도 하지만 거듭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중복이다. 금관성을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단을 그 이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봄비마저 내렸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닌가. 그래서 ‘화중’이라 하지 않았을까? 역시 너무 초보적인 상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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