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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un 06. 2024

선비와 병사


어느 분이 쓴 ‘배은망덕’이라는 제목의 컬럼을 보니 이런 말을 했다. “《전국책(戰國策)》에 ‘士無反北之心(사무반배지심)’이란 구절이 있다. 즉 ‘선비란 배반할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라는 뜻이다. 배운다는 것은, 곧 사람의 도리를 알아 가는 것, 사람의 도리를 알기에 자신에게 은덕(恩德)을 베푼 이에 대해 그 마음을 그르치거나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참으로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저기에서 ‘사(士)’는 ‘선비’가 아니라 ‘병사’이다. ‘士無反北之心’은 제(齊) 나라 장수 노중련이 연(燕) 나라 장수에게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 백성들을 죽이지 말고 그만 병사를 해산시키라고 하면서 “사람을 잡아먹고 뼈를 땔감으로 쓰고 있는데도 병졸이 배반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食人炊骨, 士無反北之心)”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맥락을 모르고 글자만 봐서 생기는 병폐다. 저 컬럼을 쓴 이는 해당 구절이 들어 있는 《전국책(戰國策)》을 안 본 것이 분명하다. 물론 모든 원전을 다 읽고 글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해당 구절이 어디에, 어떤 맥락으로 들어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한번쯤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보지도 않은 책을 마치 다 읽은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지적 사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면, 배반이 판을 치고 배신이 생리가 된 세상에서, 그가 선비면 어떻고 군사면 또 어떻겠는가. 다만 저 컬럼을 쓴 사람이 '선비'를 강조한 것은 글읽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대단한 존재일 것이라는, 아니 존재여야 한다는 오랜 선입견 혹은 편견에 긴박되어 있다는 점만은 정확히 지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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