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경환 Jun 14. 2024

희망 돛

2년 전에 혼자 다짐해 본 것이다.

무슨 일을 하다가 왠일인지 이것이 다시 불쑥 올라왔다.

무료해서일 것이다.


---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시들 말고 내가 돈을 내고 사서 읽은 첫 시집이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다. 고2 깨인 1975년 겨울, 종로서적에 문제집을 사러 갔다가 신간코너에서 그 시집을 발견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거의 매일 읽고 혼자 좋아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1957년과 1958년에 지어진 시들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瀑布’, ‘叡智’, ‘序詩’, ‘靈交日’, ‘비’, ‘冬麥’, ‘謀利輩’, ‘生活’, ‘死靈’ 등


혼자 생각이지만, 퇴직 후 시간이 나면 언젠가는 꼭 ‘김수영 시 읽기’에 관한 책을 내보고 싶다. 평론도 아니고 연구도 아니라, 그저 단상집이나 잡문집 같은 것 말이다. 김수영 관련 책은 거의 모두 모아두었고, 하나씩 천천히 읽고 있다.(그러나 그것들을 깊이 읽지는 않는다. 자칫 내 감상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때가 되면 ‘廟庭의 노래’에서부터 ‘풀’까지 모든 작품에 대해 아무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써보고 싶다.


오늘 비가 오니 ‘비’가 생각나 꺼내 혼자 조용히 낭독해 본다.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


命令하고 決意하고

「平凡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海草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透明한 움직임의 悲哀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


瞬間이 瞬間을 죽이는 것이 現代

現代가 現代를 죽이는 「宗敎」

現代의 宗敎는 「出發」에서 죽는 榮譽

그 누구의 詩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悲哀여


決意하는 悲哀

變革하는 悲哀 …

現代의 自殺

그러나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無數한 너의 「宗敎」를 보라


鷄舍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動物의 交響曲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思索家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制하는 決意

움직이는 休息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1958)


내가 태어나던 해에 지어진 시다. 사실 이 시에는 서툰 문청의 치기가 엿보인다. 말이 너무 많다. 장황하다. 정리되어 있지 않다. 유치한 시어가 많이 보이고 같은 말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중간쯤 “비가 오고 있다 / 움직이는 悲哀”에서 끝내도 좋았겠다 싶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를 읊조릴 때마다 “비가 오고 있다 / 여보 /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가 너무 좋다. 우선 그 리듬이 좋고, “움직이는 비애”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김수영도 “움직이는 비애”를 네 번씩이나 쓰고 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굳이 말하고 밝혀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시의 맛이 떨어질 수 있다. 그냥 두고 조용히 읽어보면 무수한 것들이 묻어나온다

작가의 이전글 가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