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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un 17. 2024

권필(權韠; 1569~1612) 시 번역 유감


낙화암 건너편 백마강변을 거닐다 보니, 권필의 시 <석성으로 부임하는 이안인을 보내며>가 돌에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원래 두 수로 된 것으로, 김자정(金子定)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일체의 설명도 없이 시만 있어 좀 아쉬웠다. 하다못해 권필의 생몰연대라도 밝혀주어, 이 시가 어느 시기의 것인지 알려주어야 마땅한데, 그것조차 표시하지 않았다.


돌에 새겨진 시는 다음과 같다.


부소산은 금강을 베고 흐르나니 / 扶蘇山枕錦江流

고란사 아래 배에 오르던 때 생각난다 / 憶上高蘭寺下舟

그대 가거든 가버린 나라의 자취를 보시라 / 君去試看亡國處

지금은 봄풀만 우거져 시름에 잠기게 하리 / 至今春草使人愁


좀 마뜩지 않다. 돌아와 찾아보니,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을 빌려 오면서 제3 전구만 조금 고친 것이 분명하다. 번역원의 것은 “군이 가거든 망국의 자취를 보시라”로 되어 있다. “가버린 나라”는 좀 어색하다. 고쳐서 더 나빠진 경우이다.(누군가 저렇게 번역해 주고 '수고비'를 챙겼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풀어보았다.


부소산은 금강을 베고 흐르나니

배 내려 고란사 오르던 때 생각난다

자네 가거든 망국의 자취를 보게나

지금 봄풀 우거져 시름에 잠기게 하리


대체로 다 비슷한데, 제2 승구는 전혀 다르다. 나는 “배 내려 고란사에 오르던 때 생각난다”고 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고란사 아래 배에 오르던 때”라고 한 것이다.


제1 기구는 아마 부소산을 바라보면서 읊은 구절일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부소산이 금강을 베고 흐르는 것 같다고 했다.(사실 부소산이 금강을 베고 흐른다기보다는 흐르는 금강을 베고 있다고 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강 건너에서 부소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건넌 다음, 배에서 내려 고란사로 올라가던 그때가 떠오른다는 말인 것 같다.


그리고 “망국의 자취”는 아마도 낙화암을 말하는 것일 게다. 지금도 고란사를 들러 고란초를 보고 가파른 낙화암을 걸어 올라간다. 그렇다면 “배 내려 고란사 오르던 때 생각난다”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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