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여의는 두 방식

by 진경환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말하자면 주류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당시에 이단시되던 양명학이나 노장사상에 정통한 것으로 이름난 장유(張維; 1587~1638)의 시를 읽게 되었다.


계절에 맞게 「모란꽃」이라는 시를 음미해 보기로 하자.


즐거운 맘 사라진 병든 몸이언만 / 衰疾歡情謝

아름다운 꽃 두 눈에 확 들어오네 / 名花照眼奇

누추한 집 마다하지 않고서 / 何嫌衡宇裏

늦봄을 가득 채우고 있네 / 獨占艷陽時

햇살 받은 꽃잎은 서책에 향긋하고 / 日蕚薰書帙

하늘 향기는 술잔 속에 스몄더니 / 天香入酒巵

문득 슬픈 오늘 아침 / 今朝忽惆悵

비바람에 반이나 저벼렸구나 / 風雨半離披


만사가 귀찮은 병든 몸이지만, 새삼스레 화사한 모란이 눈에 반갑다. ‘하늘 향기[天香]’는 보통 계수나무ㆍ매화ㆍ모란 등의 향기를 말하는데, 특히 모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천향국색(天香國色)’이라는 표현을 즐겨 써 왔으니, 여기서는 매화의 향기를 지칭할 터이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모란 향에 취해 술잔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햇살 받은 꽃잎 서책에 향긋’이란 표현은 시인의 품성이 따뜻하고 지적임을 보여준다. ‘햇살 받은 꽃잎[日蕚]’이란 표현은 시인의 독창이 아니라 한유(韓愈)의 것이다. 한유는 “태양 빛 비친 꽃잎 눈부시게 빛나고, 바람에 나뭇가지 한들거리네[日蕚行鑠鑠 風條坐襜襜]”라고 노래한 바 있다.[『한창려집(韓昌黎集)』 卷4 「고한(苦寒)」]


그런데 이러한 풍류와 여유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 시의 주된 심상은 역시 ‘문득 슬프다[忽惆悵]’는 표현에 있는 것 같다. 지극히 낯익은 방식이다. 즉각적으로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문학』 3호(1934.4)]이 연상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의 시가 좀더 여성적이고 격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는 있어, 약간 호들갑을 떨고 있지 않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봄을 여읜 설움’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시의 대세는 유사하다.


물론 이런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봄이 와서 좋은데, 꽃이 지니 서글퍼라’라는 반응은 좀 재미가 없어 보인다. 다른 방식으로 노래한 시도 분명 있을 것인데, 그리 눈에 많이 띄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없지는 않다. 다음 시를 읽어 보자.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 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 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셀레임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닢 한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 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박용주라는 ‘시인’의 「목련이 진들」[『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장백, 1989]이라는 시다. ‘시인’이라고 굳이 따옴표를 친 이유가 있다. 이 시는 1988년 당시 열다섯 살의 중학생이 지었기 때문이다. 이 ‘시인’을 유별난 경우로 치부하고 넘길 수 없는 것은, “한낱 목련이 진들 / 무에 그리 슬프랴”라는 시구를 얻기까지 우리 시사(詩史)는 수많은 ‘우여’와 ‘곡절’을 거쳐 와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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