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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Sep 19. 2022

뭐가 그리 급한가요?

feat. 노인 세대와 '빨리빨리 문화'

약 한 달 이야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깁스를 한 채 지하철을 타러 간 나는 그 많은 계단을 오르내릴 자신이 없어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엘리베이터는 당최 가까이 있는 법이 없었고, 경사로는 또 얼마나 길게 둘려 있던지...그 이유를 앎에도 야속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 세 번째로 엘리베이터를 탈 때였나 싶다.


목발 짚은 이와 그 동행자, 나, 그리고 노년 여성 네 명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대로 내려가나 했는데 전동차를 탄 이가 탑승하겠다며 진입했다. 먼저 탄 네 명이 가장자리로 딱 붙으면 아슬아슬하게나마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그랬다.


전동차 운전자는 내리기 전 "제가 먼저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양해를 구했고, 난 "네~." 하고 답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곧 문이 열렸다. 그런데,


전동차가 뒤로 움직임과 동시에 문 옆에 있던 노년 여성이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차와 문틈 사이에 끼었다. 놀란 나는 저절로 "어어?" 했고, 전동차 운전자도 멈췄다. 그런데도 그 노인은 기어이 좁아진 틈 사이를 몸을 비틀어 빠져나갔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갔다.


그 전동차에는 햇빛과 비를 피할 목적으로 방수 천이 대롱 위에 둘려 있어서 부피가 꽤나 컸고, 그래서 더더욱 먼저 내보내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먼저 나가려 했고, 결국 사달이 나고야 만 것이다. 전동차를 금방 멈추어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상당히 곤란하고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뻔했다.


운전자에게 "조심히 가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며 승강장 1~2번 출입구 쪽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여러모로 편치 않았다. 먼저 내린 그 노년 여성도, 불가피하게 전동차를 먼저 내보내려 했던 세 사람도, 그 운전자도 여러모로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당장 먼저 못 나가면 죽는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럴 때야말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조금 기다리면 될 것을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한국 사람들은 경향상 누가 양해를 구한다 해도 가급적 답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내가 보기엔 그렇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 양반이다.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있을 거고,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대신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다들 전동차 운전자를 먼저 내보내고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침묵이 곧 암묵적 동의일 것이란 생각은 착각을 확인하고 말았다. 누군가에겐 침묵=동의겠지만, 안 그런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임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난 강제된 배려는 절대 배려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로 배려는 철저히 선택의 차원이어야 한다. 하지만 상술했듯 전동차의 부피가 워낙 커서 먼저 내보내는 것이 훨씬 나은 상황이었음에도 그 노인은 애써 먼저 나가려 했고, 하마터면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뻔했다. '아무 일 없었으니 됐다'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맞는 말이니. 그러나 만약 일이 생겼다면? 내가 보기에 그 노인이 보였을 반응은 불 보듯 뻔다.


뭐가 그 노인으로 하여금 그렇게까지 행동하게 했을까 생각해 보니, 답은 바로 '빨리빨리 문화'였다.


빨리빨리 문화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황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몸에 밴 결과, 이제는 노구(老軀)가 된 그들은 여전히 수십 년 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버스에서 내릴 때도, 전철에서 내릴 때도 차가 멈추지 않은 상황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차가 갑자기 멈추었을 때 힘에 부쳐 밀려나가거나 넘어진 사람을 꽤 여러 번 봤다. 그렇다 해도 버스 기사에게 과실을 물을 상황이 아니다. 정차 후에 움직였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


노년층의 막무가내식 행동은 정말로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안 그런 이도 많지만 그런 이도 적잖다. 뭘 그리 빨리 못 가서 좁은 틈을 비집지 못해 안달인 건지...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유감스럽게도 마오쩌둥이 일으킨 희대의 대참사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으로 활동하며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지금에 이르러서는 따마(大媽, 중노년 여성)라 불리는 이들이 연상된다.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겠다는 이유로 지식인은 물론이고 교사까지도 잡아다가 자아 비판을 시키고 조리돌림을 했다. 그 과정에서 목소리만 커졌을 뿐 내실은 전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그들. 분명 역사의 희생양이었지만, 마냥 그렇다고만 할 수 없는 건 그들이 시대에 제 몸을 기꺼이 내맡겼기 때문이다


그 어느 세대보다 과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 그러나 그 어느 시대보다 전통이 파괴된 시대를 살았던 이들. 그 결과 그들은 정작 그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겨우 껍데기만 남은 옛 문화에 사로잡혀 그에 걸맞는 대우를 요구하지만, 정작 갑자기 형성되어 급히 굳어진 문화에 따라 살아가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졌다.", "젊은 놈들이 예의가 없다." 말하는 그들은, 과연 얼마나 각박하지 않게 살고자 애쓰는지, 얼마나 예의를 갖추려 노력하는지 묻고 싶다. 각박해진 것도 사실이고, 예의 없는 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너희가 그 모양인데 우리라고 왜 그러면 안 돼냐?" 하고 따지는 건, 똑같이 몸에 똥 묻히겠다 하는 꼴일 뿐이다.


모두가 마음 한 편에 최소한의 선의는 좀 담아두고 살았으면 좋겠다. 제발. 성선설에 동의하지 않지만, 한 조각 따뜻한 마음은 갖고 살도록 하자. 그것마저 없으면 모든 인간은 이 '냉혹한 세상'에서 한 마리의 얼음괴물로 살아가고 말 테니. 세상을 더욱 살기 나쁘게 만드는 건 결국 나 자신임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나'가 모여 너와 나를 이루니, 악의 창궐에 피아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바야흐로 '초연결 시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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