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Y Sep 06. 2022

요즘 한국, 요즘 한국 사람들

끝나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 그리고 무감각해진 사람들

서울에 올라온 지 1주일이 조금 넘었다. 분주한 생활 절주(節奏, '리듬')에 맞추어 수도(首都)의 거대한 흐름에 따라 살고는 있지만 제법 오랜 기간 이곳을 떠나 있던 내게 서울은 여전히 낯설고 앞으로도 낯설 곳이다.


한국은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와 전쟁 중이, 각종 강제 조치현재 진행형이다. 마스크가 온전히 얼굴을 덮고 있지 않으면 버스에 탈 수 없으며, 차장이 보지 않는다고 마스크 없이 지하철에 올랐다간 어마어마한 눈총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언제 비난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전쟁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전과 같지 않은 듯하다. 일단 마스크 착용은 규칙을 위한 규칙으로 전락한 지 오래. 그러니 명분이 사라진 규칙은 철폐되거나 개정되어야 하는데 바뀐 것은 없으며 바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완전히 마스크 착용을 습관으로 내면화하여 별다른 불만이나 의심 없이 행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마스크 착용 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목을 받거나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를 거닐 때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어차피 금방 버스나 지하철을 탈 테니 굳이 벗어봤자 귀찮을 거고, 아예 벗을 생각조차 안 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맨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나,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꽁꽁 감춘 채 도무지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뉴 노멀'의 힘이다. 바뀐 세상은 결코 뒤로 돌아가지 않음을 증명하는 듯,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마스크에게서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종종 한적한 지하철역에 들어서면 개찰구를 나옴과 동시에 마스크를 반쯤 걸치거나 아예 벗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난 속으로 그들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멋지고 용감한 처사라고. 애초에 이 짓을 3년 가까이 하고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고, 여전히 '비상시국' 운운하며 개인의 자유를 무제한, 무기한 제한하는 처사를 용납할 수가 없다. 상황이 바뀌었고, 이에 따라 방침과 정책, 인식을 바꾸어야 했음에도 한국은 구태의연히 대응하고 있다.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는 건가 싶다.


습관이 됐다는 것은 뭔가를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한국의 상황이 딱 그렇다. 마스크는 한국인에게 습관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마스크 착용을 정책적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되고, 이런 무의미한 조치를 개인이 거부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안 그래도 트윈데믹이니 뭐니 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독감의 동시적 유행을 우려하는 내용의 기사가 나왔지만,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드디어 숙주 경쟁에서 절대 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환영해야 마땅한 사안이다. 하지만 이미 감염병 공포증에 깊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역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에게 말한다. "마스크 써 주세요."


민주주의와 그 가치는 다수의 의지로서 실현되고 또 관철된다. 하지만 그 다수의 의지가 오히려 전체를 옭아매는 결과를 야기한다면 그것은 실로 재앙이나 다름없다. 바이러스 확산 초기, 한국인 다수가 원했던 '자유가 제한되는 삶'은 언제 끝이 나겠냐는 듯 계속되고 있고,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상을 되돌려줄 것이란 낙관적이고도 희망적인 전망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이것이 그토록 선전해대던 K-민주주의의 민낯인가? 비상 상황이니 자유는 적절히 통제돼야 하고, 그러면 사태가 좋아질 것이란 사회-정치적 예견은 어떻게 된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주류'는 여전히 침묵한다. 이는 방역이 곧 그들이 지지했던(지지하는) 누군가의 업적 내지 공헌으로 연결됐기(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조치를 비판하며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라 요구하기는커녕 이를 느슨하게 하려는 시도에 게거품을 물며 반대한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를 위함인가? 진정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맞나?


유감스럽게도 나조차 바쁘고 피곤한 일상에 치어 그냥 이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다. 어차피 생활은 계속되고, 삶은 이어진다.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다른 의미로 피곤해지는 이 세상에서 다른 목소리를 낼 여가는 없다. 그러니 그냥 침묵하는 것이다. 그저 눈치껏 벗고, 눈치껏 쓰는 삶이 통제가 일상화된 시대에 개인으로서 공략할 수 있는 이른바 '틈새시장'이다. 이렇게 해야만 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현실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고 타협한다 해서 불이익이 생기지도 않는 것 같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편한가? 그렇게만 하면 어느 개인도, 심지어는 국가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는데.


이것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뉴 노멀'이다. 우리가 누려오던 자유의 총량은 (비유하자면) '일천년래 대사건'을 맞이하여 분명 줄어들었고, 그 상태로 고착화됐다. 더 이상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이전의 삶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H대 의대 교수 L모 의사의 말이 맞는다. 이제 자유를 외치는 이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지상주의자가 되어 사회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마치 타인에게 자신의 종교적 가치를 설파하는 사람들이 외면받듯 그 또한 외면당하고 있다.


이런 세상을 십분 긍정하며 합리적인 세상, 살 만한 세상, 안전한 세상, '자유로운 세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면, 이런 세상을 십분 긍정하며 합리적인 세상, 살 만한 세상, 안전한 세상, '자유로운 세상'으로 여겨야만 제 지위를 보전받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마스크 없어도 거부당하지 않는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다시, 그리고 진지하게 묻는다. '우리'는 정말 그런 삶을 원하기는 하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 하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