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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Aug 26. 2022

방역 지속 요구의 논거, '집단논리'

그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이기적이다.

개인주의란 개인을 행동과 사고의 기본 단위로 하는 생활양식 또는 사상을 의미한다. 때문에 개인주의는 개별자의 주체성을 그 무엇보다 강조하며, 이에 따라 상호 불간섭과 불개입을 원칙으로 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상대방이 A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보다는 B 식으로 하는 게 나으니, 더 좋은 길을 알려주겠다며 '온정적 간섭'을 하는 것은 상대방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괜한 일' 것이다. 다만 타인의 요청이 있거나 누군가가 범죄나 조난을 당하여 불간섭 및 불개입으로 일관할 경우 위급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에는 한정적으로 타자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도, 그 사람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처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개인주의자는 평소에는 원칙적 무관심(거리감)을 유지하다가 상황이 허락될 경우에 자타의 경계를 넘는다. 이것이 개인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이자 미덕이다.


그런데 이런 개인주의와 달리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도 있다. 자기중심주의는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가치 체계로서, 모든 사건이 '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도록 적극적으로 상황을 조작하는(여기서 조작이란 불법적 방식을 동원하는 듯한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것을 의미한다. 행동과 사고의 본위가 '나'라는 점에서는 개인주의와 접점이 있지만, 개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의 합리적 판단인 것과는 달리 자기중심주의는 그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각되고 또 유의미한 위치에 있는지를 최우선시하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상황인 것은 아니다. 자기중심주의는 마치 모든 상황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아서 타자보다 주체 자신이 늘 앞선다. 이러다 보니 상황을 읽는 능력이나 맥락성이 다소 결여된다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이기주의는 어떠한가? 이는 철저히 판단자(행위자)의 이해(利害)가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는 가치 체계다. 자기중심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이기주의는 모든 사건의 주인공이 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다소 다르게 오로지 매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만 고려하는 행동 양식이라 이기주의자는 자기중심주의자와는 달리 상황 판단 능력이 매우 뛰어나며, 일시(단기)적 이익보다 중장기적 이익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굽힐 줄 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중심주의자가 사회성 결여된 사람 취급을 받는다면 이기주의자는 삭빠르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는 좋은 평가를 못 받는다. 누구든 간에 나만 생각하거나 나의 이익만을 고려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건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특정 사회가 어떤 경향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관점이 판이해진다. 개인주의 사회의 구성원은 타인이 내무슨 물리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의 행동에 개의치 않고 남도 내게 그리하는 것이 기본 태도지만 개인주의가 보편적이지 않은 지역에서는 개인주의를 '집단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반사회적 가치 체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들이 역사적으로 온전히 독립체로서 존재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 내지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집단에 속해야만 비로소 의의를 지닌다. 그러니 자신의 정체성이 곧 집단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것인데,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집단에 속한 것만으로 그 존재가 그에 따라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집단에의 소속감과 종속을 철저히 구분하는 반면, 집단주의 사회의 개인은 나의 이익이 아닌 집단의 이익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며, 행동을 할 때도 '이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를 고민하기보단 '이것이 타인에게 어떻게 인식될까'를 먼저 고민하기 때문에 늘 집단과 개인, 집단의식과 자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결국 다수의 논리와 사회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집단이 쉽게 스스로를 구속하게 두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인 코로나 시기에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완벽히 혼동하는 누를 범했다. 방역이라는 대의하에 집단의 이익이라 여겨지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언급해선 안 됐으며(본래 호흡이란 권리라고 볼 수도 없는, 지극히 자연스런 생명 유지 현상임에도 바이러스 확산 차단을 이유로 마스크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매우 우세했다), 이에 따라 개인은 오로지 전체 한국인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정부의 지침과 사회의 공통 인식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고, 이런 상황에 이의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즉시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서양에서도 정부의 방침에 비판적인 이들에 대해 이런 비난이 가해졌지만, 원체 개인주의 생활 방식이 강하다 보니 저항도 만만찮았다.

방역을 강력히 옹호하는 세력이 그토록 외쳤던 공동체 의식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함양해야 의미가 있지 국가가 정책을 강제하여 형성되는 것은 아니며, 절대 다수가 위기 상황에의 국가 개입을 적극 지지했기에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이기주의자로 몬 것이지, 실제로 그들(국가 방침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이들)이 전적으로 이기적다고 볼 순 없(었)다. 그러나 21세 초유의 사태를 맞닥뜨린 절대 다수는 모두가 국가의 명령과 지침에 일사불란히 행동하기를 구했, 얼마나 이를 철저히 이행하느냐로 사람을 판단했다. 국가주의 사회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모든 집단논리에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이 집단과 일체가 되어 다수에 의해 합의된 논리를 따르면 어떤 문제라 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될 것이란 낙관론이다. 집단논리란 것이 원래 그렇다. '네가 너의 의지를 내려놓고 모두의 뜻에 따르면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도출되며, 이에 따른 이익을 골고루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의 전형적인 논거인데, 이런 논리가 우위를 점한 상황에선 개인이 주체로서 판단할 존재할 틈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순간, 그는 낙관적 집단논리란 불확실한 약속을 강제로 받아들이기 위해 일차적으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함'으로써 얻는 효용과 행복을 포기하게 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벌써 이익는 멀어지게 된다. 만약 집단논리가 예상했던 긍정적 결과가 아닌 다른 결과를 낳는다면 해당 집단은 오히려 모두가 더 큰 고통에 빠지거나 심하면 공멸할 수도 있다. 이처럼 집단이 판단을 그르칠 경우 파국을 낳는다는 점에서 집단논리에는 중대한 결점이 도사리고 있며, 집단논리를 강하게 내세우는 행태는 집단이 더 나은 선택을 할 것이란 편향적 기대에 근거하고 있을 뿐다.


1997년, 국가 외환 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직면한 다수의 한국인은 '모두가 합심하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집단논리하에 정부의 대대적 선전(홍보) 및 자발성에 의거하여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는 식으로 고통을 분담했다. 그러나 이미 적잖은 기업이 도산하였고, 수많은 실직자가 발생한 뒤였다. 이들에 대한 구제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야 한다'는 구호만이 울려퍼질 뿐이었다.

금번 사태 그에 따른 반응으로 미루어 보면 너도 나도 금붙이를 국가에 내어주는 상황에서 이에 동참하지 않겠다이가 주변에 있을 경우, 그 사람은 분명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내 의지에 따라 그렇게 판단하였을 뿐인데 그것이 마치 '네가 감히 제 혼자 살려고 그러느냐' 식으로 비춰진다면 그 사람이 과연 가만히 있고 배길 수 있었을까? 아마 등 떠밀려 마지못해 금을 내놓았을 것이다. 집단주의 사회에서 비상 시국이라 여겨지는 때에 개인이 운신할 만한 공간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대하는 한국인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위기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일상을 영위했다. 그러나 특정 시점에 전국적 대유행이 촉발하면서 위기 상황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자 모두들 수비적 태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비적 태세는 곧 전투적 성격으로 전환됐다. 타인에게까지 그런 태세를 유지할 것을 암묵적으로, 더 나아가 대놓고 종용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면 사태는 좋아지지 않는다', 곧 '당신이 남들과 동일하게 행동하면 사태는 금방 진정될 것'이라는 낙관적 집단논리가 다시금 발휘되기 시작했고, 정부가 공식적으로 현재와 같은 방역을 실시하면서 마스크는 착용 의무화 행정명령이 내려지기 전이었음에도 이미 필수가 되어버렸다. 분명 자율성을 발휘할 시공간이 있었음에도 모두가 자발·주도적으로 이를 없애버린 것이다. 선택이 필수가 되는 순간, 개인의 판단, 미덕과 배려는 그 의미를 잃고 오로지 법과 제도에 근거한 처벌만이 유의미해짐에도 한국인은 '모두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의 자유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유 또한 무슨 공산주의 대하듯 터부시했다. 안 그래도 한국 사회는 21세기에 접어들었음에도 관계성과 눈치 문화에서 자유롭지 했던데다 개인주의 담론과 이에 대한 자기선언이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위기 상황'이 발생했고, 집단적 대응만이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지는 판에 이제 막 싹이 튼 수준인 개인주의의 ㄱ자조차 감히 꺼낼 수 있었을까?


자유는 이를 누리는 사람이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 시기 한국은 그런 생각 자체를 금기시했고, 이는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차라리 바이러스의 치명성과 전염력 반비례한다는 과학적 사실이라도 주지했더라면 집단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적잖은 이들이 분명 거부 의사를 표했을 것이고, 이를 지지하는 의견 또한 어느 정도 세를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공포에 휩싸여 이성을 발휘할 겨를이 없었고, 여전히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분하지 못했던데다 자유주의의 기반이 다름아닌 개인주의임을 인식하지도 기에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통제식 대응만을 요구했다.

개인의 선택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자유 사회라 할 수 없으며, 개인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지 못하고,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주된 논리에 밀려 설 자리를 잃는 곳 또한 자유 사회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집단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유 관념과 대치된다. 개체가 자유를 포기해야만 집단성이 비로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집단의 안녕, 곧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도 모자라 아예 소각해버리는 중대한 과오를 범했고, 자신의 생각과 관점에 의거하여 정부에 말이라도 꺼내는 사람들을 국적을 막론하고 모조리 이기주의자로 규정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K-방역이란 이름의 통제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자 한국인과 한국 정부는 뿌듯함을 느낌과 동시에 타국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됐으며, 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 '무능하다'고 폄하하는 한편 정부의 통제를 따르지 않으려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리석고 악한' 존재로 규정하는 교만함을 보였다. 그 오만한 태도는 끝내 한국인의 발목을 제대로 잡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권익을 그것도 합법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국가뿐이므로, 국가가 아무리 좋은 명목을 내세운다고 해도 개인의 주권과 자유를 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 자유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취해선 안 되는 두 번째로 어리석은 태도는 '내가 나의 자유를 포기할 테니 국가가 나의 모든 것을 일일이 책임져 달라'는 것이고, 가장 어리석은 태도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모두의 자유를 제한해달라' 청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태도를 그 누구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취한 이들이 한국인이었다.


바이러스 대유행 시기, 집단의 안녕은 '공공성''시민의식'이란 그럴듯한 단어로 포장되어 모두가 추구해야만 하는 지상가치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공공성과 시민의식은 철저히 자발적인 의지와 선택에 의거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국가가 법률이나 행정 제도로 강제하면 의미가 없다. 공공성과 시민의식을 발휘하는 존재가 '시민'인데, 시민은 그 누구보다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이러스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면서 시민의 개념과 그 범위는 국가와 여론에 의해 대폭 축소됐고, 오히려 '인간'이라는 상위 개념이 시민이라는 하위 개념에 갇히게 되면서 개인은 이제 국가 정책과 사회적 시선으로 철저히 국한된 개념으로 전락한 시민성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태어나 시민으로 불려 왔음에도 더 이상 시민이 아닌 존재로 격하되고 말았다. 이런 편협한 시민성은 이 시기에 시민과 관련된 그 어떤 담론도 허용(용납)하지 않았고,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가치 일원화'에 근접해졌다. 자본주의적 용어로 표현하면 기업이 독과점을 통해 시장을 잠식하듯, 비상 시국을 이유로 제한되고 축소된 시민 개념 및 담론은 사회를 금방 장악했고, 개인은 순식간에 이런 일원적 가치에 물들었다. 그 결과, 한국은 위기를 극복하기는커녕 되레 전 세계에서 방역을 가장 오랫동안 지속하는 나라가 되었다. 유행 초기, '통제'에 실패한 서구권 국가로부터 받은 방역 선진국이란 호평, 찬사와는 대비되는 결과다.

그 나라들은 지금 어떻냐고? 말하면 입만 아프고 손만 피곤해진다. 마스크 없이 정말 잘 살고 있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조치를 중단하고 코로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사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드디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 한국처럼 아직까지 방역과 통제에 골몰하는 나라에 관심을 가질 필요, 그런 나라를 더 이상 '잘하고 있다'며 칭찬할 이유가 있을까? 너무나 뻔하게도 없다. 그러니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 것이다. 당사국인 한국만 이 사실을 모른다. 모르는 건지, 외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집단논리'에 의거하여 개인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했던 것은, 개별적으로 사태에 대응하는 것보다 집단논리에 순응하는 것이 분명 원하는 결과에 더 빨리 도달하게 해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한국인은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개인을 억압하고 부자유하게 한다' 생각하여 하루빨리 벗어던져야 할 가치로 간주했던 집단주의의 늪에 서로를 밀어넣었으며, 그렇게 헤어날 수 없는 방역의 늪으로 계속해서 빨려들어갔다. 마스크 없는 삶을 바란다던 한국인은 되레 마스크에 기이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고, '마스크가 막아줄 거라던 바이러스는 도대체 언제쯤 활동을 멈추려나' 싶은 생각마저도 무의미하게 할 정도로 바이러스는 우리 곁을 마음껏 누비고 있다. 그렇다면 통제는 결코 방법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인식을 전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 왔다'는 이유로 절대 다수가 별 효과도 없는, 오히려 유행을 장기화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니, 사실은 본인들이 상황 악화를 자초한 꼴이다.


집단논리는 늘 희생자를 낳으며, '사회적 약자' 또는 '취약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그 희생양이 된다. 집단논리를 형성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는 사람이면 몰라도, 약자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집단논리를 따라야만 하는 수동적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노령층의 감염을 막아 사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노인들은 그런 집단논리로 인해 떨어져 사는 자녀와 손주들을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그나마 있는 이웃과의 교류조차 완전히 끊며, 요양원 또는 요양병원에 있는 이들은 아예 면회조차 금지되어 사실상 그곳에 갇혀 생활해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감염 방지'를 명목으로 그들에게 할 짓인가 묻고 싶다.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인권을 마구 침해해도 되는 것인가?

아이들의 경우 바이러스에 취약하니 어른들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려면 그 부모부터 아예 사회 생활을 완전히 중단하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는 게 현실이며, 정작 아이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와 사회에 의해 호흡에 지장을 주는 마스크를 강제로 써야 하는데, 심폐 기능이 온전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마스크 착용이 득일지 진지하게 고려하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싶다.

또한 마스크 착용은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착용이 강제 및 장기화되면 아이들의 얼굴 식별 능력을 떨어뜨리는데다 표정과 입모양을 보지 못하므로 비언어적 표현 습득에 지장이 생기며, 무엇보다도 각종 바이러스 면역 형성을 저해하여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 막겠다고 전체적인 질병 저항성 자체를 떨어뜨릴 수 있는데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결국 '감염되면 큰 문제가 생길 이들을 위해서 방역이 지속되야 한다'는 논리는 결국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반영된 것일 뿐, 정작 취약계층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고립의 늪으로 몰아넣으며, 그저 '감염되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을 이유로 당사자들(노인, 아이 등)의 의사와 이익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취약계층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방역을 지속해야 한다면, 이 논리에는 '취약계층이 아닌 이들'의 집단적 이기심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모두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결과가 도리어 모두를 괴롭게 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다수의 한국인은 외면하고 또 부정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믿음' 때문이다. 한 번 굳건히 형성된 방역과 통제에 대한 믿음은, 그것이 더 이상 바이러스 확산을 차단하는 데에 소용이 없게 되었음에도 개인과 집단, 곧 '전체'를 강하게 추동하는 요인으로 오랫동안 그 효력을 발휘해 왔기에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래도 집단의 이익을 위해 방역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며, 그토록 원해 왔다는 마스크 없는 삶을 스스로 마다할 것인가? 이는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사안이다. '지켜 봐야지' 또는 '어떻게든 되겠지'란 안일한 인식은 한국인을 방역 지옥의 핵으로 끊임없이 밀어넣을 것이고, 현상 파악도 못 하고서 아직도 방역 통제 운운하는 이들은 그 주장이 자신의 목에 칼로 돌아왔음을 아직도 인지하지 못했거나 아예 사고 자체가 마비되었음을 자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질서를 옹호하는 이중적 존재로, 사람들은 흔히 자유와 질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말하고, 나 또한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유가 보편적 가치가 된 시대에 질서는 최소한도로, 정말 필요할 때 기준으로 작용해야 하며 그마저도 매우 신중하게 적용돼야 한다. 만약 구체적으로 '이렇다' 판단하기 쉽지 않아 어떤 상황인지 인식하기 어려울 경우, 그 질서는 가급적 단기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한 후에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다시금 자유가 질서의 우위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질서가 자유를 언제고 압도하는 자리에 있다면, 그 사회는 자유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그토록 혐오하고 기피하는 권위주의 사회로 이행하고 말며, 그 경향이 더욱 심해져 극에 이를 경우, 그곳은 모두가 인지하지 못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 실상 전체주의 사회나 다름없게 된다.


나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거의 모든 국가가(사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 또한) 권위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통제 아니면 봉쇄라는 극단적 방식은 마치 일당독재 국가에서 대중을 통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강제성을 지닌 국가의 방침에 항의하는 것은 나만 아는 이들의 발악 정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위기 또는 비상시임을 이유로 체제의 후퇴를 적극적으로 용인한다면, '모두의 이익'은 마치 사막 한가운데나 극지방의 신기루처럼 닿으려야 도무지 닿지 않는 허상으로서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집단과 전체에 종속된 모든 개인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채 도리어 '제한된 자유와 권리'를 전적인 자유와 권리, 100%짜리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다수가 전체의 이익이라 주장됐던 바를 위해 체제의 후퇴를 용인했다는 것이고, 그렇게 자신들이 그리도 경계하고 지적해 온 권위-공산주의 국가의 일률성(일괄성)과 집합성을 적극적으로 강제하여 스스로의 손발을 묶었다는 것이다. '비상 시국' 타령하며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태도가 위험한 이유다. 다만 여전히 다수의 한국인은 이를 위험하다고 생각조차 안 하고 있어서 답답할 뿐이다. 이런 이들에게 일상의 회복은 민들레 씨앗이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가듯 끊임없이 요원해지기만 할 것이다.


모두의 판단이 옳고 또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란 발상은 집단논리에 휩싸인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집단성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또한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일상은 결코 쉽게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이 나라에 밝은 미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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