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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Mar 15. 2023

노예의 길

자유와 권리의 보장, 그리고 시민(성)에 대하여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이 가장 불편해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노예'다. 개개인에게 정치적 권리가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간 평등'을 기반으로 이뤄졌기에 봉건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곧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표지와도 같았던 '노예'라는 말을 왜, 뭐 하러 입에 담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그런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은 전근대 시대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수준의 자유와 부유함을 누리고 있으며, 상위 계급에 의해 부당하게 구속되거나 억압받는 일은 더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와 노예는 완전히 반대되는, 그리고 상충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사회를 보라. 과연 개인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우리는 지배 계급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그 무엇도 나를 얽매지 못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또한 무엇보다 개개인이 '나는 자유인'이라는 개념을 근원적 차원에서 함양하고 있는가?


누군가는 '그럼 내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냐'라며 반문하거나 따질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적어도 이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체주의 독재 국가를 제외하고) '자유'의 의미, 즉 모든 판단과 결정이 온전히 '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기본 전제와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노예는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주인에 의해 제한받는 철저히 종속적인 존재다. 이를 고려하면 한국인은 노예와는 거리가 멀다. '계급'이 법적으로 철폐되었고, 내가 하고픈 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국가'가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제한적인 자유다. 자유의 동의어는 '불구속'이다. 그러므로 내가 자유로우려면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무언가의 개입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국인은 근 몇 년간 국가라는 유일한 권위체의 제약을 그 어떤 사회보다 강하게 받아 왔다. 내가 나의 전적인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었고, 국가의 방침과 법률에 의거하여 나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하라는 대로' 해야만 했다. 여기서 노예와의 접점이 생긴다. 아무리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라 할지라도, 권위에 순종/굴복하는 이상 그는 실질적으로는 시민이 아닌 존재로 격하되고 마는 것이다.


전근대 시대의 노예는 혈통과 법률에 의해 태생적으로 노예였다. 즉 모태에 있을 때부터 노예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에 의문이 있더라도 표출하면 안 되었다. 불복종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심지어 (당시엔 없는 개념이었지만) 주인에 의해 '신체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노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의 예외가 있었다. 주인이 그를 노예로 대하지 않으면 그는 비록 노예로 태어났더라도 노예가 아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일러 면천(免賤) 또는 속량(續良)이라 한다. 실제로 노비 문서를 소각함으로써 '신분적 노예'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면 그는 노예로 태어났음에도 노예처럼 살지 않을 수 있었고, 주인이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그리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는 비로소 양인(良人)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언급했다시피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에 해당했다. 전근대 시대의 이른바 '정상적인 국가'라면, 노예는 반드시 존재해야 했고, 그 비율은 줄어들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국가는 더더욱 노예의 혈통을 유지하려 애썼고, 자국인을 노예로 부리지 않는 나라에서는 타국에서 노예를 수입해 왔던 것이다.


반면, 근대 이후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많은 이들이 드디어 신분적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들을 구속하는 그 어떤 존재나 집단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내가 나의 의지대로 행동하여 그 결과를 누릴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민주주의의 목표였으며, 그러한 변화는 더는 권력자의 지배와 통치의 대상으로서 그들에게 시혜를 구하는 존재가 아닌 나의 자유와 권리를 '내가 위임한 이'에게 적극 요구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파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로 개개인을 그야말로 승격시켜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사회에서 면천된 노비와 같은 예외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태되자마자 인간은 '잠재적 시민'으로 대우받으며, 세상에 나오는 순간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시민이 된다. 노예(노비)로 태어난 이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평생 주인과 사회에 종속되어 그 노동력을 착취당해야 했지만, 시민으로 태어난 이는 자유와 권리가 뭔지 모른다 해도 이를 지닌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시원(始源)적 평등인 것이다.


이런 사회에는 언뜻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도 치명적 문제가 있다. 이는 바로 '시민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 권위체의 지침이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것은, '집단화'된 다수 시민이 그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당하게 두는 것이다.

'자유의 원형'을 누릴 수 있는 이는 불행히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가 충돌한다면 이를 일러 '자유의 전적 실현'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이 본질적 의미의 자유에는 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 자유의 원형에 가까운, 곧 '최대한의 불구속'을 추구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권위체와 모든 개인의 지상목표가 되어야 한다.


한데 자유의 제한은 개인보다도 힘을 지닌 집단인 권위체가 집행하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는 법적으로 보장되는 동시에 법적으로 제한을 받는다. 사람들은 이를 조정이나 중재를 이유로 쉽게 받아들이며 '불가피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해당 사회에서 자유와 권리에 대해 100% 체득하지 못했기에 생기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법령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나의 자유와 권리는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정말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자유와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자유 제한의 주체인 권위체에 대항하여 침해의 최소화를 외치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다. 아무리 대의자의 합의에 의해 제정된 법률을 근거로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의도가 모든 인민의 의지와 합치한다는 보장은 없기에, 권위체가 구상하고 규정한 대로 '나'와 '모두'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도록 순순히 손과 발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주권'에 대한 인식 수준과 성숙도가 높지 않다면, 그러한 조치가 초래할 후과(後果)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권위체의 지침에 순순히 따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면 권위체가 결정하고 지정한 '위기 상황' 동안 시민으로서의 정치·사회적 자유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함을 넘어 자연스러운 행위조차 무기한 통제당하는 결과가 발생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리를 지닌 개인이 스스로 노예로 전락하는 유일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 제한이 진정 자유와 권리의 전적 보장에 지장을 가해야 할 만큼 심각한 사유로 인함인지, 또한 그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그로 인해 발생할 각종 폐해와 부작용(역효과)은 없는 것인지를 숙고하지 않고서 그저 권위체가 하라는 대로,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여러 세력과 여론에 휩싸여 그야말로 '군중심리'에 의거해 자유와 권리의 명운이 좌우되도록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시민성에 어긋나며, 이는 곧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시민 스스로가 저버리는 행위에 해당한다.


자유와 권리란, 비록 그 보장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법에 명시되어 있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개인'의 몫으로서 스스로가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국가가 이를 제한하겠다 할 때 반드시 '저항권'을 발동하여 (그 정도든 기간이든 간에) 최소한의 침해로 귀결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항의하고 협상하여야 하며, 아무리 '모두의 자유와 권리의 침해'로 '다수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유와 권리보다 앞서는 이익이란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됨을 인지한다면, 그 잠재적 이익에 가려질 잠재적 피해 또한 최소화할 수 있도록 국가에 적극적으로 조정과 개정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에는 '시민'으로서 이렇듯 자유와 권리 보장에 대한 치열하고 강한 수준의 고민이 부재하다. 이러면 권위체에 의해 사회 전체의 자유와 권리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길게 제한되고 침해되어도 '어쩔 수 없다', '하라니 하는 것뿐이다'라는 식의 반응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시민으로서 자유와 권리 보장을 외치는 이들을 '시민이 아닌 존재'로 매도하고 비난하여 그들이 자신의 저항권과 의무를 발동하고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이는 곧 시민이 시민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시민을 '권위에 의한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나의 의지로 나의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는 것은, 오로지 '나' 곧 개인 차원에 국한되어야 하지 국가 차원의 강제적 조치로 그리되어서는 안 되며, 이에 반대하는 이를 '비시민'으로 규정하여 개인/사회적 폭격을 가하는 것은 오히려 시민이 시민 되기를 포기하겠다 선언하고, 다른 시민에게 '당신은 시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말하는 것과 같다.


노예가 본인의 의지로 양인이 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시민에겐 스스로 '사실상 노예'로 전락할 의지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를 무너뜨려 개개인이 자발적 반(半) 노예가 되는 최악의, 그리고 매우 위험하고 참담한 상황인 것이다.




한국인은 지난 몇 년간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려 항거하는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을 '시민(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매도했으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보라.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았으며, 한국인이 그토록 원했던 일상을 주체적으로 되찾은 반면(물론 공식적으로는 각국 정부의 현실에 대한 인정이 있었다), 한국인은 권위체의 부당한 처사에 순응한 것도 모자라 되레 그 일상 회복을 스스로 미뤄옴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개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지극히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가 제한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마저도 '단계적으로 돌려주겠다'는 국가의 방침에 '다행이다', '고맙다', '드디어!'라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형국이다.


나는 묻는다. 도대체 한국인이 갖고 있는 시민(성)에의 개념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한국인이 인식하는 시민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국가와 사회에서 정한 규칙을 순순히 따르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타인의 시선과 암묵적인 문화를 우선시하는 것이 진정 시민이란 말인가?


시민이란 타율적 존재가 아니라 자율적 존재이며, 아무리 타율이 내세워지는 상황이라도 최대한 자율성을 발휘함으로서 타율과의 최소한의 접점(타율이 자율을 장악하지 않는 것을 이름)을 추구하는 존재야 한다. '나'의 영역은 줄어들거나 없어지고 '남'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이름만이 내걸리는 사회는 결코 시민 사회라 말할 수 없으며, 그런 것을 일러 시민(성)이라 하며 다른 이를 비시민으로 낙인 찍으려는 이들은 단언컨대 시민이라 자처할 자격이 없다.

무슨 과학적 근거가 보여준다느니, 다수가 이에 동의한다느니 하는 것에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을 지켜나갈 권리를 행사하고, '자유와 권리 제한을 통한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장'이라는 달콤한 말에 속지 않고 진정 그것이 약자와 소수자에게 이로운 것인지를 따져 이의를 제기하는 존재야말로 진정한 시민이라는 것이다.


안타깝고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거의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으로 권위체와 여론에 의해 개인의 자유와 권익이 대대적이고도 전방위적으로 침해되는 상황의 발생이 우려될 때, 각자가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는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이는 자유와 권리, 그리고 시민(성)에 대한 모독이자 비극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자유와 권리의 수호에 있어서『맹자』의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사람은 반드시 내가 나를 모욕한 후에 다른 이가 모욕하고,
가정은 스스로가 해친 이후에 다른 이가 해치며,
국가는 스스로가 친 이후에 다른 이가 정복한다.

(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家必自毁而後人毁之 國必自伐而後人伐之)

『맹자』 <이루> 上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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