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어떤 상황에서 제한될 수 있을까?
방역이 깊게 할퀴고 지나간 자리를 어루만지기 위해.
영단어 freedom은 스스로 자自, 말미암을 유由 자를 써서 '자유'로 번역됐다. liberty의 경우 자유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주로 '해방'으로 많이 옮기는데, 자유와 해방 두 개념은 본질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종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유의 관계에 있으며, 타인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행위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말미암는다'는 번역은 꽤나 훌륭하다
좌우간 누군가가 자유롭다는 것은 모든 판단과 결정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뜻이며, 그런 상태에서는 개별자의 독립성과 주체성이 절대적으로 보장·강조된다.
하지만 그런 원론과는 달리 인간은 결코 모든 상황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자유에는 반드시 구속(拘束)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자유와 반대되는 개념이 자유를 둘러싸고 있는 건 자유에 불안정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이나 견해가 있음을 드러내며, 이는 곧 자유가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함'이 아닌 '내적 규율을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상태'란 관념으로 드러났다. 이 관념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도덕과 법이란 두 체계로 전승되어 왔다.
분명 개념적으로 자유는 존재한다. 그러나 현실을 고려할 때 자유는 수많은 이유 및 수단으로 제한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자 내지 본질적 의미로서의 자유란 끝내 온전히 실현될 수 없는 형식적 개념에 불과한가?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밝혀두건대 '현실적으로' 그렇다.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서의 '나'는 존재함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외부 세계의 경계 대상이 된다. 자유가 적용되는 대상은 한정적이므로 자유 행사의 주체가 하나라도 늘면 자유는 그만큼 늘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어들게 됨이 이치인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만 수십억 명이니, 그 수십억 가지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척도가 자유의 의미를 내세우며 각기 다른 판단을 관철하려 할 경우 타협보다는 상호간의 투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척도는 대개 이해(利害)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본질적으로 '나'라는 단독자가 아니라 '남'이라는 외부자와의 관계로 구성된다고 봄이 합당하며, 자유의 이상적 의미는 한 인간이 그 무엇에게도 방해나 제약을 받지 않는 전적 불간섭 상태가 아니라 구속(拘束)의 정도가 가장 낮은 상태로 규정된다. 즉 개인이 어떤 상황에서 스스로가 자유롭다 느낀다면 이는 그가 전적으로 그 무엇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상태인 것이 아니라 즉각적(또는 순간적)으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구속의 정도가 최소한도인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자유는 늘, 반드시 무언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자유의 이면에 있는 구속을 절대시할 경우 인간은 전적 구속만이 스스로를 안전하게 한다 생각할 수 있고, 이는 곧 자유는 사실 스스로가 아닌 타자가 보장해주는 매우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심지어 궁극적으로 불필요한 개념으로 굳어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입법자나 정책 결정자의 위치에 있지 않고, 법을 통해 자유를 보장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시민)은 개인·사회적 자유의 제한과 구속을 함부로, 또 쉽게 언급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런 경향은 사회 차원의 비상상황이나 개인의 심각한 일탈(범죄 등)이 발생했을 때 매우 두드러지는데, 다수 여론에 의해 자유가 한번 제한되면 이는 결코 원상태로 회복되지 못한다. 이것이 자유의 특성이자 한계며, 본래 권리라는 것은 그 절대성을 보장받지 않으면 쉽게 침해당하게 되므로 확고부동한 위치에 있어야만 그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관념은 일순간에 바뀔 수 있지만, 일단 바뀌면 그 영향은 상당히 장기간 지속됨을 고려할 때 '어차피 자유의 보장 정도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가변적이니 얼마든 제한될 수 있다' 생각한다면 자유는 언제고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자유는 이를 누리기 위한 수단(돈, 권력과 같은 사회적 자원)을 필요로 하기에 어떤 측면에서는 상당히 취약한 개념이고, 인간이 다른 인간과 불가피하게 공존하는 이상 서로의 존립을 보장하기 위해 일정한 틀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병 안에 든 액체'와 같다. 즉, 절대적 자유란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유는 그 보장을 위해 반드시 제한되어야 한다'거나 '다수의 이익을 저촉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자유는 침해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남발한다면 여론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다수의 전제(專制) 상태로 빠질 위험이 있으며, 아무리 일인 전제에 따른 자의적 판단을 막고자 '법의 지배'가 성립했다 한들 결국 법은 민주정이란 틀 안에서 다수의 의지 또는 그들의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의 결정로 제·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절차적 복잡성이 전제되어 있다 해도 끝내 다수의 일시적 판단과 이에 따른 결정에 무력화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이 자유의 제한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다.
자유 제한의 논거로 '타인에게 해를 입힘'을 드는 이들이 많은데, 이를 위해선 '즉각성'과 '방어성'을 따져야 한다. 즉각성의 경우 누군가의 행위에 따른 결과가 타인에게 얼마나 바로 드러나느냐를 말하고, 방어성은 누군가의 행위가 타인에게 부정적 결과를 야기한다고 예상될 경우 이를 최소화하거나 무마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느냐를 말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즉각성을 더 중시하지만 사실 핵심은 방어성이다. 내가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부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 상황 자체는 이미 피할 수 없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상황을 잘 넘길 수 있는 수단, 즉 '부정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는 이를 십분 활용하여 상황이 발생한 것과는 별개로 이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 나는 이를 '최소 수단 보유의 원칙'이라 명명하고자 하며, 그 내용인즉 개인의 자유는 타인이 누군가의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거나 그 행위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확보하지 못할 때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의 행동이 부정적 결과를 낼 것이라 예상되는 경우(또한 실제로도 그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이를 방지하거나 줄일 최소한의 수단이 확보된(또는 그런 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개인의 자유는 제한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코골이로 예를 들어보자. 코골이는 절대 개인의 의지로 인한 현상이 아니다. 어떤 인간이 미쳤다고 '저놈을 골탕먹이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코를 골겠는가? 그러니 코를 고는 사람 주변에서 자는 이들은 꼼짝없이 이를 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황 자체는 피할 수 없음'이다. 그런데 만약 귀마개(이어 플러그)가 있어 코골이로 인한 수면 곤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분명 누군가가 코를 골면 이 자체만으로 주변 사람들에겐 해로움이 발생한다. 하지만 귀마개를 꽂아 그 소음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을 쫓아내거나 모두가 그 장소를 떠날 수 없는 한 이는 주어진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된다. 그러므로 피해 상황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상황에 대처할 수단'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수단, 그중에서도 최소한의 수단마저 없다면 타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는 개인의 자유 행사는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한다면 굳이 타인의 자유 행사를 막을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그 상황에서는 자신의 안정(안전) 보장을 도와주는 수단의 확보가 관건이 된다.
길거리 흡연도 적절한 예시다. 가만히 서서 피우든, 길을 걸어가면서 피우든 간에 흡연 행위 자체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는데, 특히 문제가 되는 건 두 번째 경우다. 길을 지나가면서 담배 연기를 뿜어대면 그와 마주치는 사람도, 그의 뒤를 따라 걷는 사람도 연기 흡입을 피할 수는 없다. 마주 오는 사람은 그가 걸어온 길을 갈 테니 연기를 마실 것이고, 뒤따르는 이는 그가 가는 방향으로 갈 테니 당연하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일단 누군가가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우면, 어떤 수를 쓴다 해도 연기 흡입은 불가피하다. 순간이동이나 바람을 일으키는 마법의 발동은 현실에서는 아예 고려할 수조차 없는 일이므로 사실상 간접 흡연을 피할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곧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를 방지하거나 모면할 그 어떤 수단도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길을 걸으며 흡연하는 행위는 충분히 제재할 수 있다. 더욱이 해당 상황에서 흡연자는 자신이 길을 걸으며 담배를 필 경우 주변인이 담배 연기를 흡입할 것임을 분명 인지하고 있을 것이기에 고의성 측면에서도 문제가 된다. 그러니 그가 걸어가면서 흡연할 자유는 상대방이 담배 연기를 마시지 않을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타자에게 연기 흡입을 피할 수단이 보장 내지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러한 사항을 근거로 제한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사례가 의미하는 바는, 자유의 제한은 그 무엇보다 신중히 고려되어야 하며, 함부로 자유를 제한하는 처사를 피하기 위해서 사회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파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서 무슨 일만 생기면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말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임과 동시에 자유의 제한을 두고 심사숙고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처사일 뿐이다. 적어도 이 사회의 근간이 자유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유의 제한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고, 자유의 제한이 광범위하고도 미세한 영역까지 가해질 것을 고려하여 이를 막기 위한 최대한의 조치가 무엇인지 고민하여야 하며, 이러한 고민은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이뤄짐이 바람직하다. 근현대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상은 기본적으로 자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흔히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의 의견,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제한돼야 함'을 단편적으로 인용하여 자유 제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비록 자유의 제한은 헌법에 언급되어 있고, 정말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또한 불가피하게 제한되어야 하겠으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는 단서조항은 경험적으로 볼 때 온전히 그 법리적인 판단에 의거하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자유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른 맥락하에서 다뤄질 소지가 다분하기에, '문제가 생겼으니 당장 자유를 제한하라' 말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그런 부정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또는 광범위하게 대처 내지 타개할 만한 수단을 거의 모든 구성원이 쉽게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자유의 제한을 고려하기 전에 '그런 상황의 발생을 과연 개인의 자유를 집단 차원으로 제한함으로써 막을 수 있는가'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결국 정책 결정층과 대중의 기민하고도 진중한 판단력과 지혜의 발휘 없이는 함부로 자유 제한을 언급해선 안 된다. 순간의 감정에 따른 즉각적 판단이 다수의 의지를 힘입어 파국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 있어 극단적이고도 매우 비인간/반사회적인 방식을 택한 건 확산 차단에 지나치게 골몰하여 자유를 제한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무력했고 무지했기에 그 실체의 윤곽이라도 파악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불가피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에는 정도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각국 정부는 정도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확산 차단만을 위해 장기간의 통제식 방역 또는 봉쇄와 같은 초유의 방식으로 대처했고, 각 사회와 수많은 개인은 이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바이러스 확산 차단을 목표로 자행된 것에 각국 정부는 반드시 반성하고 사죄해야 하며,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개인이나 집단 또한 마찬가지다. 이 모든 사태와 과정을 유야무야 넘긴 채로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느니와 같은 승전 구호를 남발한다면 그 나라와 사회에는 자유주의를 표방할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이유 있음'을 이유로 대중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를 합리화한 전체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를 비판/비난할 근거를 잃게 된다.
방역은 동시대 그 무엇보다 정치적이었고, 사람들은 그 정치 행위에 그 어떤 때보다 큰 영향을 받았다. 각국의 의료 체계와 정부의 역할, 시민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보다 '정치'와 '자유(의 가치)'에 대해 성찰이 전제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중요하고 시민의 주체성이 부각된다 한들 국가가 정책을 시행하여 특정 행동을 강제하고 다수가 이에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면 자유니 책임이니 하는 것은 즉시 무의미해진다. 책임에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무의 영역에 책임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그러므로 책임을 논하려면 자유의 보장이 선행되어 있어야 한다. 방역을 명목으로 개인('시민')의 책임을 운운한 이들이 놓친 게 바로 이 점이다. 자유 없는 책임이라니, 팥 없는 단팥빵과 무엇이 다른가?
9.11. 23:0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