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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Sep 13. 2022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는 사회, 고통을 피하려는 사회

고통은 악일지 몰라도,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악은 아니다.

‘아픈 것(고통, 통증 등)은 나쁜 것이다.’

아마 거의 모든 인간이 지닌 공통인식일 것이다.

 

고통은 개개인에게 많은 어려움을 준다. 재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사람을 너무나 힘들게 해서 때로는 삶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심지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마저도 누군가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과는 달리, 고통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내가 원치 않는다고 고통이란 화살이 나를 비껴가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나를 찾아왔을 때, 이를 피하려던 갖은 노력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뿐이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으로 매정하고도 무심한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네가 겪은 일도 아니면서 어떻게 감히 다른 이에게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하느냐 비난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각자의 상황이 다 다르니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를 확장하면 인류는 어떻게든 고통을 이겨내고자 노력해 왔고, 그 과정에서 더 나은 지평에 도달하기도 했기에 고통을 받아들이라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그 과정에서 결국 고통에 패배하여 넘어지거나 스러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유감스럽게도 모두의 바람과 달리 고통이란 결코 정복할 수 없(었)다. 고통을 정복한다는 것은 인간이 더는 인간으로 불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데 주지하다시피 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특성과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이를 벗어난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인류의 진보, 특히 근대의 과학 및 산업혁명으로 일궈낸 획기적인 삶의 개선은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주었다. 그러나 ‘영구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그토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만큼이나 인간은 ‘그럼에도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음을 절감했고, 이를 어떻게든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부단히 있었으나, 인간은 그때마다 딜레마에 직면해야 했다. 이는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그 경계를 넘을 것인가?’였다. 인간은 찬란한 문명을 이뤄 왔지만, 저 문제만큼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가 인간 이상의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이 얼마나 유한하고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이것이 진보와 발전의 역설인 것이다.

 

고통이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이행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는 너무나 많은 문제와 모순을 직면해 있다. 지역의 격차, 주거의 격차, 빈부의 격차, 지식수준의 격차 등 수많은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말이다.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 나쁘다 평하긴 곤란하다. 사람은 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인식과 행동에는 여러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순간 내지 단기적 손해(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사회가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갈 것이란 긍정적 전망이 담겨 있는데, 그런 점으로 인해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염려는 별로 담겨 있지 않다. 그냥 기대에 따른 결과가 나올 것이란 결론을 낸 상태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역효과가 발생하여 더 큰 문제가 생기면 수습은 누가 하나? 모두가 해야 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이런 상황을 이르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고통을 줄이기 위한 시도는 아무리 목적과 의도가 좋더라도 생각지 못한 결과가 도출될 경우 바로 나쁜 게 되며,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면 가능한 한 빨리 돌이켜야 한다. 이걸 어쩔 도리가 없다며 지속하거나 가만히 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그 영향은 더 많은 이들에게 끼쳐질 것이다.

 

모두가 잘살게 하겠다는 사상이 언제 실현된 적이 있었던가? 그 정신과 취지는 바람직지 몰라도, (수단의 문제도 있었거니와) 이를 이루려는 시도는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대부분 그저 현재의 모순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가는 방향을 택했고, 사람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에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각종 사회 모순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함부로 개혁을 외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고로 고통은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이 있는, 매우 불편하고도 불쾌한 존재, 이를 없애려 갖은 수를 다 쓰다가 오히려 고통이 가중되어 파국을 낳을 수도 있음 또한 인정해야만 하,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려면 반드시 잃는 것이 있고, 때로는 그 잃는 것이 고통을 없애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바이러스와 감염이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물적·지적 자원을 동원해 왔지만, 그것이 되레 역효과를 낳아 언제부턴가 그 노력이 모두의 발목을 잡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목을 죄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한때 ‘경험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라 믿고 택한 길이 어느 때부턴가 수많은 이에게 더 큰 괴로움을 주고 있단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만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낳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인데 무엇을 더 고민하나? 더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눈앞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더 크고 장기적인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처사다.


그러므로 모든 한국인에게 주문한다. 이런 삶과 방식이 모두의 고통을 줄여줄 것이란 생각에서 빠져나오라. 그리고 하루빨리 우리가 누렸던 삶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라. 그것만이 이 시점에서 우리가 택해야 할 가장 바람직하고 좋은 길이다. 한국 사회가 진정 감수해야 할 것은 방역을 지속함에 따른 부작용과 비용이 아니라 방역을 전면 중단함에 따라 발생할 다소간의 결과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일상 회복은 우리의 곁에서 더욱 멀어질 것이, 통제된 삶을 자유로운 삶이라 착각한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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