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바라보는 사람의 초점은 ‘현재’에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오늘, 지금, 여기’다. 그러므로 그에게 악은 단지 고통인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악은 ‘당장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내일의 고통은 ‘내일의 나’의 몫이며, 오늘의 내가 추구해야 할 바는 어떻게든 오늘의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분리되어 있다. 그렇게 단절된 채로 존재하던 양자(兩者)는 당일 23시 59분 59초와 내일 0시 0분 0초 사이의 잘게 쪼개진 ‘찰나’의 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결된다. 그마저도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나자마자 끊어지고 만다.
바이러스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이와 같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의 내가 바이러스에게서 안전한가’의 여부다. 물론 ‘내일의 바이러스’도 요주의 대상이다. 바이러스는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그리도 기피하는 건 ‘오늘을 살아가는 나’로서 언제 어디에서 이에 감염될지 모르기 때문이며,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마스크에 그리도 목을 매는 것은, 내일의 내 건강보다 오늘의 내 건강을 지키기 위함이다. 내일은 어딘가에 있어 아직 오지 않은 불투명한 대상일 뿐이다.
그렇다. 모든 것이 ‘현재성’을 기준으로 결정되고 판단된다. 지금 내게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가 절대적 척도인 것이다. 이런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래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을 이름의 오늘일 뿐, 오늘과는 당장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추구해야 할 것은 오늘의 쾌락, 오늘의 안락함, 그리고 오늘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바이러스 감염을 피할 수 있으면 오늘 어떤 조치가 적용되어도 상관없다. 그 조치가 나의 턱을 조여 불편함을 끼친다 한들, 이로 인한 해악보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음으로써 얻는 편익이 크다고 판단되면 사람들은 기꺼이 해악을 감수한다. 그렇게 ‘현재성’은 천하무적이 된다.
저출산 문제, 비수도권 소멸 문제는 ‘현재성’이 적용되는 다른 예시다. 당장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당장 수도권 과밀 현상을 해결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아이가 없으면 수고로움을 덜 수 있으니 편하고, 특정 지역에 각종 시설이 잔뜩 몰려 있으면 놀 거리도, 볼 거리도 많으니 좋다. 국민연금이 언제 고갈된다는 뉴스가 나와도, 훗날 경제활동인구 1명이 부양해야 할 노인의 수가 지금보다 더 많아진다는 보도가 나와도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의 누군가가, 심지어는 미래의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지 지금의 나와는 무관해서다. 과거의 내가 학교생활을 할 때에는 한 반에 3-40명, 한 학년에 10반까지도 있었는데, 지금의 아이들은 한 반에 20명대, 한 학년에 4반 정도 되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해도 별 감흥이 없다. 기껏해야 “그렇구나. 많이 줄었네.” 하고 말 뿐이다.
서울·인천·경기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지방 소멸에 관심이 없다. 수도권 이외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지방 소멸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수도권으로 향한다. ‘지금, 당장’ 나에게 편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지 머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지옥’으로 자신을 들이밂으로써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해악은 그곳에 거주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각종 편익보다 낮다는 이유로 과감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인구 감소에 따라 생업에 지장이 생긴 접경지대의 주민들이 ‘먹고 살아야 함’을 이유로 군인들을 등쳐먹어도, 지역 공무원이나 의원이 세금으로 외유성 출장을 가도 별 관심이 없다.
기후 위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몫이지만, 이를 야기한 건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것을 무진장 만들어내어 사용한 과거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집중한 건 ‘오늘, 지금, 여기’였다. 그들이 그렇게 현재에 집중한 결과, 우리는 어쩌면 누리지 못했을 수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들이 그렇게 현재에 집중한 결과, 우리는 어쩌면 피할 수 있었을 재앙을 꼼짝없이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나은 내일이 아니라, 더 나은 오늘이었고, 그들이 이루어놓은 더 나은 오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편익과 더불어 쉽사리 감당할 수 없는 해악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오늘을 사랑하는 우리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해수면 상승으로 가라앉는 지역은 저기 태평양 가운데에 위치한 여러 도서(島嶼) 국가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문제’로 와닿지 않는 한, 사람은 계속해서 오늘, 지금, 여기만을 바라본다.
당연히 지금 당장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미래를 고려할 이유는 없다. 바로 지금 누군가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이러한 조치가 훗날 어떠한 폐해를 낳을지, 심지어는 지금 당장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또 불필요하다. 그렇게 중장기적 관점이건 단기적 관점이건 간에 방역의 지속과 마스크 착용 의무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이들은 ‘현재성’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 또는 현재의 편익보다 해악을 중시한다는 이유로 비난과 질타를 받으며, 목소리를 내지 말 것을 강요당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라는 대로 따른 결과, 이 나라는 아직까지도 방역의 늪, 마스크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에 충실하면 1년 뒤에는 사태가 해결될 거라 믿었던 것이, 또 오늘에 충실하면 그 다음 해에는 사태가 해결될 것이란 믿음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햇수로 3년째가 된 지금, 사람들은 어김없이 ‘오늘에 충실하면 내년에는 정말 좋아질 것’이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에 충실한 것이 과연 내일의 내게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은 대가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내일이란 이름의 오늘’임을 애써 외면한 채로.
현재성은 사람들을 아주 잘 설득한다. 그리고 쉽게 홀린다. ‘네게 중요한 건 지금이지 오지 않은 내일이 아니라’고, ‘그러니 지금 당장 즐거워하고 지금 당장 고통을 줄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오늘의 행복은 내일의 행복일 것이라며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그러나 오늘의 행복은 반드시 내일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깨달은 내일의 나는, 어제란 이름의 오늘을 그리워해봤자 달라지는 것 없이 그저 어제의 내가 미뤄놓은 고통을 감당하는 것밖엔 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내일의 나'는 또다시 오늘의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사실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내일의 자신에게 그 고통을 전가한다. 그렇게 행복을 누리고 고통에 시달리던 한 세대가 사라지고 나면, 그 몫은 곧 다음 세대의 것으로 떠밀리고, 앞선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괴롭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떠넘겨진 고통에 허덕이면서도 전 세대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행복을 좇아 고통을 다시금 다음날로 미룰 것이다. 이처럼 오늘의 한국인이 ‘오늘’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이들은 스스로가 포기하고 미룬 자유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란 헛된 희망을 품은 채, 오늘의 안녕을 위해 오늘의 자유로움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매일같이 범할 것이다. 다만 그 안녕을 당장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며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