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기, '진보'를 다시 보다.
단언컨대 이 시기 진보는 결코 진보적이지 않았다.
요즘 네이버 기사 댓글란을 보면 그곳에 댓글을 썼던 이들이 한때 '네일베'라 불렸던 것이 무색할 만큼 현 정권에 대한 비난 일색이다. 도대체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 정권을 아주 원색적으로 비난하던 이들은 어디에 집단 격리됐는지, 아니면 다른 우주로 이주했는지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는 보수 세력이 그토록 원했던 정권 창출이 실현되었으니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리라.
이들이 주로 비난하는 것은 영부인인 김건희 여사의 행보와 윤석열 정부의 방역정책이다. '확진자가 늘고 있는데 이게 과학방역의 결과냐' 비아냥대며 그들이 방역에 실패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한국의 진보 세력이란 이들이 얼마나 물어뜯을 것이 없으면 이런 것을 가지고 공격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보수 세력도 그랬다. 문재인 정부의 방역 정책과 대통령 본인, 김정숙 여사를 헐뜯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같은 나라 국민이라 그런지, 하는 행동이 어쩜 이리 비슷한가 싶다. 한쪽은 '정치방역'이라고, 다른 한쪽은 '과학방역'이라고 상대방을 조롱한다. 내가 보기엔 양쪽 다 본질은 전혀 짚지 않고 표면만 문제시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들은 이를 모르거나 부인한다.
이 글을 통해 '진보'만을 논하려는 건, 내가 코로나 시기에 한국의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진보는 스스로의 본래 이념에도 충실하지 못했고, 진보라는 사상이 지닌 매력마저 잃어버렸단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보주의의 비판자를 자처한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진보주의가 어떤 사상인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진보란 '개인을 구속하는 일체의 권위에서 그를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정치 및 사회 이념'으로서 곧 '탈권위적 사상'으로 요약된다. 진보에서 말하는 탈권위란 (적어도) 국가나 정부와 같은 자유 및 민주주의 사회의 사실상 '유일한 합법적 권위체'로부터 개인이 종속되거나 이에 휘둘리지 않음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진보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이다. 이 설명은 보수주의와 겹칠 수 있는데, 이는 근대 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와 진보주의가 같은 뿌리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만약 근대 자유주의, 즉 사회계약론을 필두로 한 공화정 또는 민주정 이론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현대 진보주의는 태동할 수 없었다. 원래 보수는 진보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올 때 비로소 보수가 되지만, 선후관계를 엄밀히 따지면 보수가 먼저다(그러니 늘 후에 나온 이들에게 '반동'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엄밀히 말해 진보의 것이 아니었다. 왜냐, 진보주의자의 선배인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 즉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태동 이전에 존재했던 종교 또는 국가(민족)공동체를 적극적으로 해체했기 때문이다.
전근대 시대에 개인을 결속하던 것은 기존의 사회 문화였다. 이는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대개 종교거나 국가 이념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을 결속하기는커녕 구속함을 인지한 이들은 이를 해체하려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이것이 왕정 타도 또는 입헌군주제의 성립으로 실현되자 개인은 의도의 여부와 상관없이 전통적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됐다.
문제는 이렇게 질서에서 빠져나온 수많은 이들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는 '부르주아 계층'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 활용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민중이 적극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자본가의 부가 축적되는 만큼 자본가가 아닌 개인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에서 극으로 밀려났고 또 소외됐다. 개인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상이 정작 개인을 경제적 패자(敗者)로 전락시켰고, 이렇게 소수의 경제적 자유가 다수의 경제적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까지 위축시킴을 본 이들이 (패트릭 드 닌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자유주의 제 2의 물결'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고전적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현대 자유주의, 곧 진보주의의 탄생이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1700년대에 태동했다면 현대 자유주의는 1800년대에 성립됐다. 현대 자유주의자에게 고전적 자유주의는 자본가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사상으로 전락해버린 후였기에, 그들이 외치는 자유가 사회 전체의 자유도(自由度) 제고로 이어지지 않음을 확인한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국가)의 개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1800년대에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이어 공산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이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영향을 받은 이들은 더더욱 국가가 개인의 삶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수정자본주의'의 형태로 적극 수용되면서 1900년대 후반 등장한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자본주의 및 자유주의 사회를 휩쓸었음에도 '복지국가'의 형태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다.
국가의 개입이란 대개 '부의 재분배'를 의미한다. 이는 부를 축적한 소수의 개인이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여기서 정치적 영향력이란 경제 영역을 넘어선 여러 방면에 대한 영향력을 의미한다)을 행사하여 각종 이익과 자원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의 재분배는 본래 개인의 선의 내지 이타심으로 행했던 자선을 국가 차원에서 법적으로 강제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당연히 누군가의 경제적 자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혈통적 세습 지위가 철폐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군가가 경제적 지위를 십분 활용하도록 둔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습 지위를 용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개인의 주권이 최소한도로 보장되게 하기 위해, 또는 개인이 최소한의 삶의 수준을 영위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강제적 방식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본가(기업가)와 고전적 자유주의자를 제외하면 이에 크게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다. 그만큼 복지국가를 위시로 한 부의 재분배가 보편적이고도 '당연한' 개념으로 확산되었다는 의미다(물론 이는 자본주의의 적용 정도에 따라 국가별로 차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 진보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지만,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국가주의적 경향을 띠게 된다. 거의 모든 사안과 문제를 다루는 주체가 '국가'고, 이를 지지하는 이들이 바로 진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런 국가주의적 경향이 사회 차원으로 보편화될 경우, 국가의 정책 수립이나 집행에 방해가 되는 개인(집단)과 여러 요소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논리가 성립된 것이 바로 금번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진보주의자를 위시로 한 국가주의적 경향이 '위기' 내지 '비상시국'을 이유로 무조건적, 무비판적으로 적용되어버린 것이다. '목적을 위해 소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서 '목적을 위해서 모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확장된 진보주의의 이념은 방역의 주체인 국가가 그 목적을 달성하여 '성공' 내지 '사태 종식'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강제 조치의 시행도 마땅하다며 합리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팬데믹이 가짜'라거나 심지어 '팬데믹은 계획됐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이들뿐만 아니라 '팬데믹은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처사며, 바이러스가 한번 확산되면 정책으로는 막을 수 없다' 주장하는 이들마저도 공동체의 존속과 유지, 공중보건에 저촉되는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이기주의자'로 매도당하고 말았다. 미국의 경우, 몇몇 기업에서는 백신 미접종자를 해고하는 초강수를 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경우 백신 미접종자에게 '기본적인 외출'을 제외하고는 외출을 불허하고, 이를 위반하면 벌금을 물리는 조치를 시행하기도 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방역패스(백신패스)'를 도입했는데, 이는 백신 접종이 법률이나 행정명령의 형태로 강제되지 않았음에도 사실상 정책으로 백신 접종을 강요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를 집행한 것은 '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라고 여겨지는 다수의 국가였는데, 국가 방침(방역)을 시행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개인의 행동을 강제하는 국가주의적이고 또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보였음에도 '모두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각국 정부는 이를 합리화했으며, 이러한 결정을 지지한 이들 대부분이 의학(감염병, 호흡기 질환) 전문가를 제외하면 진보 세력이란 점은 간과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
당연히 각국의 보수 세력은 이에 반발했다(유일하게 동아시아 지역의 보수 세력만 이런 조치에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들은 진보 세력에게서 '팬데믹'이란 위기를 지나치게 얕잡아 본다는 비판을 받았고, 개인의 자유를 외친다는 이유로 '이기주의자' 취급을 면치 못했다. 사실 비판받을 이들은 그들이 아니라 검역에 실패하여 바이러스가 확산되게 한 국가여야 했음에도, 그들은 기존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또는 일률적인 강제조치가 부당하다 주장했단 이유만으로 초국가적 비난을 받았다. 아, 내게는 보수 세력을 옹호하거나 변호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다. 저 '보수 세력'에는 위에 언급한 극단주의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우파의 탈을 쓴 대중영합주의자인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 정략적 비난을 가하면서 반중 정서가 범지구적으로 강해졌는데, 이에 따른 역효과로 서구 및 아메리카 지역 내 아시아 출신자가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는 점은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사항이다. 이건 결코 옳지 않다. 하지만 보수 세력의 헛발질과는 별개로 결국 바이러스 확산 차단을 명목으로 국가주의적 권위주의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진보 세력의 입김은 팬데믹에 대한 공포감을 힘입어 모든 국가로 확산됐으며, 이와는 별개로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방역을 명목으로 더욱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했다.
특히 한국의 진보 세력이 보인 행태는 그 어느 국가, 집단보다 전체주의적이었다. 한국인은 좌우를 막론하고 자유에 대해 '유사시(비상시)에는 얼마든 제한될 수 있다'는 다소 약한 형태의 관념을 갖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한 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통제를 외쳤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쟁취하려 했고, 실제로 쟁취한 개인의 자유를 군사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손쉽게 제한했다. 그 이유는 '실체적(실제적) 위협'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는데, 군사정권에서 공산세력의 확대와 그들의 재침공을 실체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권위주의적으로 통치했다면 이번 팬데믹 시기의 정부는 '바이러스 자체와 그것의 확산'을 이유로 일률적 강제조치를 적용했다. 이에 대해 당시의 국민은 전쟁을 경험했고 또 반공주의 교육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정부의 강권통치에 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권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이를 밀고하여 그가 처벌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지금의 국민은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과 전파 매개체가 '인간'임을 이유로 정부의 강제조치에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이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정책의 부당함을 이유로 강제조치에 따르려 하지 않는 이를 신고하여 제재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권위주의 시기의 국민 대다수가 '국가가 국민을 공산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이유로 그 통치 방식을 옹호했다면 팬데믹 시기의 국민 대다수는 '국가가 국민을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준다'는 이유로 그 강제조치를 옹호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주도하는 세력이 다름아닌 민주화 세력이고, 그들의 논리가 바로 1960-80년대 군부 및 이를 지지하는 이들의 논리와 다름없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그들이 그토록 증오했으며 타도하고자 했던 정치 주체를 비판하고 비난했던 이유가 바로 현재 자신들이 보이는 경향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개인을 결속했던 전통적 공통체가 해체되면서 개인은 '시민'이란 존재로 재구성됐다. 다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은 어떤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그저 한 인간으로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들이 '시민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당하거나 시민 취급마저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며 심지어 체제의 관점으로는 '악한 처사'다. 하지만 근대 민주공화정 성립 이후 개별자로 존재하게 된 이들이 시민이 되고,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개인이 더욱 파편화되고 원자화되자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문제로 여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금 개인을 결속시키기로 하는데, 그 결속 수단이 바로 '시민성'이었다. 부르주아 계층에 한정되었던 시민 개념이 보편화되면서 시민성은 진보주의 성립 이후 더욱 주목과 연구의 대상이 됐는데, 이마저도 특정 입장이나 견해를 가진 이들에 의해 성립되고 조직되기에 '인간'이란 대개념을 '시민'이란 소개념에 끼워맞추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보다도 '인간'이란 존재에의 탐구가 선행돼야 한다. 왜냐면 전근대 시대의 인간관과 근현대기의 인간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민은 인간을 앞설 수 없다. 그러므로 시민은 절대 인간의 상위 개념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아무리 선의로 개인을 재결속시키려 했다 해도 그 재조직 작업이 과연 개인을 억압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느냐는 의문이 남게 된다. 만약 그들이 고안해 냈고 또 제시한 시민성에 부합하지 않는 시민이 있다면, 그리고 그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그는 체제의 성립과 함께 자동으로 시민이 됐는데,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일러 시민이 아니라 할 것인가? 이를 누가 규정할 수 있는가? 이는 국가도 개인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시기, 국가의 방침과 이를 적극 지지 및 옹호하는 이들은 해당 정책과 입장을 따르지 않겠다는 이들을 '비(非)시민'으로서 오히려 시민성을 저해하며 민주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이로 규정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법치'와 '질서'를 들었다. 시민성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의견을 갖는 것이 민주 사회고, 이는 개인의 양심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뭐가 참된 시민성이라 주장하는 것과 별개로 이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반민주적 행태인데, 그들은 과거에 '법치'를 운운하며 인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제한했던 독재 정부와 동일한 논리를 펴며 주류의 의견을 따르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대대적인 포화와 제재를 가한 것이다. 법이 법이라면 그것이 악법이라도 따라야 한다는 논리가 기득권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구성됐다 주장해 왔던 이들이 정작 법은 법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 이에 불편하고 불쾌한 기시감이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이러스 유행에 따른 공포감을 내면화하여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한국의 보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윤석열 정부가 방역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 또는 '범(泛)진보 세력'에 속하는 이들이야말로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을 '팬데믹 시대의 시민성'과 결합시켜 이에 항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반민주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존재로 매도했으며, 이런 시각과 관점은 바이러스의 치명률이 약화될 대로 약화되어 더 이상 방역을 진행할 필요가 없는 시기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한결같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당신은 잠재적 살인자'라는 것. 이런 논리로라면 확진 판정을 받은 (7.17 0시 기준) 약 1870만 명의 국민은 사실상 살인자나 다름없었고, 여전히 감염되지 않은(어쩌면 감염되었지만 집계 대상에는 안 들었을지 모를) 3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잠재적 살인자인 셈이다. 과연 방역과 통제를 지속하자 외치는 이들은 본인들이 짜 놓은 틀에 본인들이 갇혀 있음을 알기나 할까?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것이 과연 진보적인 이념에 부합하기나 할까? 이들은 보수는 곧 수구고, 진보야말로 모든 이들이 받아들여야 할 사상이라 말하면서 정작 그 진보가 그토록 중시해 온 '자유'를 훼손하고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결코 이념이 아닌 '공포'란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복지국가의 등장 이후 국가 역할론이 이렇게까지 사회 전면에, 모든 개인에게 와닿은 적은 없었다. 나 또한 시대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기에 국가 개입을 기본적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코로나 시기, 바이러스 확산 차단을 이유로 국가가 개인에 가한 정책적 강제는 실로 심각한 수준이었고, '헌법 37조 2항'에 의거하여 개인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 한들 그 단서 조항인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쉽게 넘겼다. 방역 지속 논리는 '개인의 자유는 국가가 방역 실패나 종식을 선언하지 않는 이상 무기한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는 국가의 빅 브라더화(化)를 부추김으로써 국가가 미시적 영역까지 개인의 삶에 개입하게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하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에서는 방역을 중단하고 더 이상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폐기해야 했음에도 이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에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그리고 국제 사회의 진보주의자들은 이런 발상이 잘못됐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들이 그러지 않고 있기에 인류는 진작 종식했어도 될 팬데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거의 '바이러스 박멸'을 종식의 목표로 삼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 보았듯 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기주의자 및 반사회적 프레임을 견지한다? 이는 결코 진보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수구 기득권에 부합하는 사고 방식이다. 이와 더불어 방역으로 바이러스 확산을 저지하고, 이를 통해 사태가 종식될 수 있다 믿는 것은 현대 진보주의자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자본주의와, 그 원리인 근대성에 해당한단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근대성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바이러스 대유행을 대하는 태도가 딱 이 근대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 근대성이 사태를 해결해 주었다면,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애초에 전 세계를 결코 '팬데믹 상황'에 처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진보주의는 민주주의와 닮았다. '다수의 자유', '다수의 이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최대한 많은 이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고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다. 그러나 그 다수 논리가 다수 전제(專制)가 되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고, 이것이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사회 전체로까지 그 폐해를 끼칠 수 있단 점에서 되레 민주주의에 치명적이며 또 자유주의를 공격하는 기제로 작용함에 유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쪽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는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이룰 수 없는 헛된 목표를 위해 표류하게 될 것이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모두의 곁에서 점점 멀어질 것이다. 난 이번 사태를 통해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뭔가를 좀 깨달았으면 좋겠지만, 그러기는커녕 여전히 방역과 확진자 수치를 근거로 상대편 정부를 비난하는 모습을 볼 때 그럴 일은 없겠구나 싶다. 이렇게 진보주의가 답이 없고 무지성적인 사상이 되기까지 도대체 진보주의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전 세계에는 (아무리 불가피성을 운운한다 하더라도) 권위주의(적 경향)가 확대됐다. 그리고 이를 가속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이들은 다름아닌 '진보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개인을 얽매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며 나아왔지만, 정작 '이유가 있음'을 이유로 권위를 내세웠다. 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늘 나아간다'는 자신들의 대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반성 없는 진보는 진보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진보의 탈을 쓴 수구 세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