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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Dec 23. 2022

이제는 일상적 통제 지속이 기본값

뉴 노멀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지난 15일에 있었던 실내 마스크 의무화 조정과 관련한 토론회(사실상 마스크 강제에 찬성하는 이들의 회동)에 이어, 오늘 23일에는 실내 마스크 의무화 조정안이 발표됐다. 요약하면 4개 조건 중 2개 이상이 충족되면 마스크 의무를 '단계적'으로 해제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2개 이상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1단계 의무화 해제라 할지라도) 시행 시점을 못박지 않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출처 :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981364&ref=A

이 말인즉 일반적으로 호흡기 질병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겨울철에는 사실상 마스크 착용 의무를 완화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정부의 방역 지속과 마스크 착용 강제 조치에 이의를 제기해 온 인사들을 배제한 채 '시기상조론'이나 '신중론'을 운운해 온 이들의 말만 수렴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그나마 이르면 내년 1월쯤 시행될 수도 있었던 마스크 의무화 조치 단계 폐지마저도 정기석 교수가 부단히 언급한 내년 3월 이후로 밀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으며, 한국인은 그렇게 마스크 없는 삶을 누리지 못할 공산이 상당히 커졌다.


마스크 의무화 단계 폐지는 아직도 감염병을 위험하게 보는 이들 입장에선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들은 어디서든 마스크를 써야 감염 발생율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도 집착하는 수치(數値)가 드러내듯 마스크 착용이 실내외를 막론하고 강제됐던 지난 3월에야말로 한국에서는 매일 전 세계 최다 확진자가 발생했으며, 여전히 '위험시설'이라는 이유로 모든 실내에서 착용이 강제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도 수만 명에 달하는 감염자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 효과가 끝내주는 마스크 덕에 8차 유행까지 온 걸까? 어린아이라 해도 잘 설명해 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되물을 상황인데, 마스크의 효과를 맹신하며 계속해서 의무 조치 지속을 주장하는 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진실을 외면한 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예 정부에서는 지난 5월 실외 마스크 의무화 조치만 해제하지 말고 마스크 의무화 조치를 전면 해제했어야 했다. 실제로 바이러스 유행이 여름철에는 어느 정도 사그라드는 것을 감안한다면 전 세계의 추세에 맞춰(당시 기준으로도 몇 개월 늦지만) 그때 모든 의무화 조치를 폐지하고 마스크 없는 삶을 시작다. 하지만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는 마치 '우리가 국민에게 내리는 은혜'인 것마냥 그마저도 부분적으로 실외 마스크 의무화를 해제했으며, 여기에 의사라는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자 현 성남시 분당구의 안 모 의원은 비과학적 처사라며 반대 의견을 던졌다.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현재 정부나 언론에서는 마스크 강제가 2020년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대중교통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된 2020년 5월 말을 기점으로 잡는 것이 타당하다. 대중교통은 다수가 이용하는 시설로, 이곳에서 마스크 착용이 강제되는 순간 마스크는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나마 의무 공백기였던 1월부터 5월 중순 이전을 제외하면 한국인은 무려 2년 7개월이나 강제로 마스크를 착용해 온 것이다.


민도(民度)가 높은 사회라면 이 정도의 장기간 강제에 집단으로 항거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 보편적이며, 실제로 서구 사회에서는 적잖은 이들이 정부의 각종 통제 조치에 반하여 시위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집단적 강제 조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이기주의자라 매도하고 규탄했다. 그 결과가 전 세계 사람들은 이미 관심도 없는 이 방역과 마스크에 한국 사회가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이라면, 자유를 외쳤던 이들을 비난하며 이미 의무가 돼버린 마스크 착용을 마치 상호간의 미덕이자 배려인 것처럼 포장했던 지난 시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수많은 이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시작과 함께 '뉴 노멀' 개념을 제시했다. 사실 이 뉴 노멀이란 말은 중국에서 먼저 쓰였는데, 2010년 이후 10%대의 고속 경제 성장이 끝나고 점차 1%대로 둔화되면서 이런 상태가 고착화됐단 의미로 '신창타이(신상태, 新態)'란 말을 사용한 것이 유래였다. 즉 본래는 경제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져 더는 코로나 유행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뉴 노멀'이란 개념이 새롭게 제시된 것인데, 결과적으로 볼 때, (내 식견이 그리 길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작 이 뉴 노멀 개념에 대한 논의가 매우 활발했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이 개념이 거의 사그라들어 거론조차 안 되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나라가 사실상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 이전의 삶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아시아권 이외 지역 사람들이라 해서 바이러스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방식대로 산다고 해서 제재를 당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그게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지 않아 마스크를 쓸 뿐, 타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는 일은 현저히 적었다. 그러므로 각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감염자 계수와 마스크 강제 조치를 중단한 것은 일상 회복에 있어서도 상징적 조치을 뿐이다.


하지만 동양 사회에서만큼은 이 뉴 노멀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무엇보다 현재 정부에서 가장 오랫동안 국민을 상대로 방역과 마스크 의무 조치를 지속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이 동아시아 지역에 몰려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제로 코로나' 정책을 시행한 중국이었으며(다만 중국 정부가 3년 내내 제로 코로나 정책을 유지한 것은 아니다), 11월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실외 마스크 의무화 조치'를 해제한 대만(중화민국)이고, 그 다음 그리도 K방역의 우수성을 선전했던 한국이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이기에 예외로 둘 수 있으나,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한국과 대만은 아직까지도 매일 감염자 수를 집계하여 발표하고 있고, 장기간의 마스크 강제로 인해 착용이 완전히 일상화되어 마스크가 없는 것이 되레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동양 사회가 그 어느 문화권보다 '뉴 노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이자 예시다. 특히 해당 국가(지역)에서는 이런 강제(통제) 조치를 '민주주의' 및 '공동체 의식'과 연관하여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이 개인의 의식 구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실로 '뉴 노멀'의 완벽한 실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방역을 주도한 대만과 한국에 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대만에서는 중국국민당의 일당 독재가 40년 가까이 이어졌고,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부를 이어 군사 정권까지 독재가 또한 40년 가량 이어졌다는 점이 첫째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있었다고는 하나, 개인이 단일한 권위체에 의해 집단적으로 조직됐던 역사적 경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개인을 대상으로 한 정부의 조치가 쉽게 효력을 발휘할 만한 정치사회적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위 '진보주의 정당'이 집권 여당으로 있으면서 방역이 적극 시행됐기 때문에 이것이 정권의 치적으로 활용된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문재인 정부가, 대만에서는 민주진보당 출신의 차이잉원 정부가 집권 중이었는데, 두 정부의 바이러스 대책은 '정부가 바이러스 유행 차단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외쳤던' 서방 언론의 주목과 찬사를 받았고, 문 정부와 차이 정부는 이를 '국민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하는 정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유산은 매우 깊게 남아 한국과 대만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렇게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마스크 착용이 강제되는 나라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문제는 두 나라만 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부동산과 같은 민감한 재산권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집단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제한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한 사회에서는 개인이 정부 지침에 의문을 갖게 되더라도 이를 행동으로 보이기가 매우 어려우며, 그런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에는 그러한 조치가 부당하다며 원상복구할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서로 눈치나 보면서 해 오던 대로 할 가능성이 높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국과 대만이 딱 그러하다. "왜 우리만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이에게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우리까지 그렇게 해야 해?"라고 말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게 중국의 예시가 아닌가? 당의 영도가 있어야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인민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 말이다.

정작 그런 행위를 한국의 질병관리청과 보건복지부에서, 대만의 위생복리부에서 하고 있는데다 정부 정책에 관여하는 소수 의사(겸 교수)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니 바이러스 유행 이전의 삶으로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이를 애써 유예해 왔고, 그 결과 회복탄력성이 완전히 떨어져버린 것이 한국과 대만의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이미 세뇌되다시피 한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살고 있으며, 특히 해당 정부 지지자들은 이것이 현(전) 정부의 공적과 연결되는 부분이기에 지금에 와서는 아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대체 이 지경까지 온 사태를 누가 책임지려 할 것인가?


이 시기에 '민주주의'와 '공동체적 결집'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화됐다는 것은 자유와 민주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이라면 다 알 것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다수 여론에 의해 운용되는 체제란 것엔 이의의 여지가 없으나, 소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프랑스 정치학자였던 알렉시 드토크빌이 우려했던) '다수의 전제(專制)'이며, 민주주의는 오히려 다양한 의견이 교차하는 가운데 다른 생각을 참고·수용하며 꽃피는 것이지, 과반이 합의했다고 하나의 의견만이 우세를 점하면 훼손되고 만다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더군다나 비판과 토론의 장이어야 할 과학계가 정부 주도의 방역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다른 목소리는 완전히 묻히고 배제된 채 하나의 의견만이 주를 이루었으니, 사회가 경직되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뉴 노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수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으면 철저히 배척당하고 심지어는 사회 구성원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사회,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맞이한 뉴 노멀이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사회는 예상치 못한 형태의 뉴 노멀을 맞이했고, 그 뉴 노멀이란 사회 구성원이 여론의 주도와 정부 정책으로 형성된 하나의 사고 방식/행동 양식을 따라야만 일상을 문제 없이 영위할 수 없는 것임이 여실히 드러난 지금, 정부와 소수의 전문가라는 이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고집불통이란 생각은 않고 계속해서 위험과 위기를 운운하고 있기에 한국 사회가 그토록 원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일은 2023년까지는 없을 것이라 본다. 가장 기본적인 인신의 자유가 무분별하게, 그리고 소수에 의해 장기간 제한되는 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재명파 윤석열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만 하는 상황에서는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정말 이 사회에서 입 닫고 살지 않는 이상에야 안간힘을 써서 이민을 가는 것만이 선택지가 되어버린 상황까지 와 버린 것이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얼마 전, 언론에서 마스크 의무화 해제가 국민에게 설 선물이 될 것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정부와 몇몇 정치인 마스크 의무화 해제를 검토하여 국민에게 설 선물로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발언을 했는데, 도대체 자유의 가치를 얼마나 개차반으로 생각을 하면 주고는 것으로 표현했나 싶어 화가 났다. 자유=선물? 이런 등식은 봉건 왕조 시대에나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 의무에 대한 보상과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할 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자유를 논한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애초에 개인의 존엄과 선택할 자유를 절대시하지 않는 사회에 무슨 자유가 필요할까?


공동체의 안녕이란 집단 논리에 의해 정치와 학문, 사회와 문화 등 모든 영역이 마비된 한국 사회, 이미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전 세계 사람들이 보이기는 한 건지, '나만이 옳다'며 외딴 섬 고립되기를 자처한 듯한 이 나라. 이런 에서 정치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가소로운 일인지...얼마나 편협한 시각과 왜곡된 자기우월성을 지녔으면, 적잖은 사람이 아직도 위기라느니 위험하다느니 타령하며 이 사회를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밀어넣는 것일까?


나라에 애꾸눈인 앵무새가 너무 많다. 그런데 그 앵무새의 논리를 반박하려다 보니 나까지 앵무새가 되고 말았다. 이 짓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어휴.



#실내마스크 #실내마스크의무화폐지 #방역중단 #K방역은없다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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