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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an 28. 2023

오늘날 한국인은

줄에 묶인 채 자라 온 코끼리와 같다.

코끼리가 태어났다.

찰나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게 됐다.

단단히 조인 과, 꽉 박힌 말뚝 때문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몇 해가 지났고,

코끼리는 집채 만한 성체가 되었다.


이제 녀석에겐 언제고 그 말뚝을 뽑아 밖으로 나갈 힘이 있었다.

한데,

조금만 힘을 쓰면 뽑힐 말뚝에 끊길 줄이건만

육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도 크고 강한 녀석은 도무지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앉았다 서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 코끼리는 줄을 끊고 말뚝을 뽑을 의지를 잃은 지 오래였다.


이를 일러 '코끼리 사슬 증후군'이라 한다더라.


사람들은 여러 날, 여러 해를

'위험'과 '죽음'이란 단어를 들으며 살아 왔다.

그것이 정말 모두에게 위험한지,

모두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하는지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많은 것이 가정과 추측을 기반으로 결정되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일상'을 되돌려줄 것이란 믿음 하나로만 살아왔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가렸고,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습 코끼리와 크게 달랐던 점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줄과 말뚝에 묶이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 줄에 매였을 뿐만 아니라,

줄에 매이기를 원치 않는 이까지 그리 되기를 원했다.

정작 한번 몸에 감겨 단단히 고정된 줄이,

언제, 누구에 의해 풀릴지도 몰랐으면서

감히 '너도 묶이라'며 소리를 지르고, 감춰진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여러 날, 여러 해가 지났다.

약속과 당부를 일삼던 자들은 일상을 돌려주지 않았고,

사람들은 매인 상태에 익숙해져 이를 풀어 제칠 생각조차 못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줄'이었는데도.


곧 말뚝을 뽑아 주겠단다.

그런데, 웃기게도 줄은 풀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냐?

위험하기 때문이란다(???).

말뚝을 뽑으면 줄도 끊고 푸는 게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직 위험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대체 말뚝은 왜 뽑으려는 걸까?

말뚝과 분리된 줄은 또 무슨 의미일까?

각종 수치와 자료를 내밀며, 괜찮아졌다고, 나아졌다고 하는 이들이

정작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고, 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줄은 늘 몸에 묶은 채로 다니라 요구한다.

이게 희극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런데 더 웃긴 것은,

적잖은 사람이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말뚝을 뽑고,

줄만 풀면 되었던 것을

자진해서 말뚝을 박고, 몸에 줄을 묶어서 그런 것일까?

말뚝을 뽑아 주겠다는데도

'불안하다'며,

'때가 이르다'며,

스스로를 묶은 줄을 더 단단히 조이고

망치로 말뚝을 더 깊게 박으려 한다.

이게 무슨 의미냐 물으며 말뚝을 뽑으려는 이들에게,

되레 '당신들이야말로 무슨 짓이냐' 반문하며

그들을 비난하고, 바보 취급하는 그들.


그러면서도,

말뚝과 줄에 매여 그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코끼리를 불쌍해하는 사람들.

이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자유는,

누군가가 끊고, 뽑아주어야 할 줄과 말뚝이 아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며

마음대로 재단하고 훼손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이를 스스로 망가뜨리는 순간,

더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다.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자유를 갖다 바쳤건만

그 시간 동안 과연 나아진 게 있긴 한가?


이런 이들이 아무리 개혁과 변화를 외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묶인 사슬을 끊어야만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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