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을 처음 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기억으로는 고교 2년생 때였던 것 같은데 기록상으로는 3학년 때였다니 그랬나보다 하며 살고는 있다.
왜 했을까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내 피를 받아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해서 했다기보단 별 이유 없이 그냥 했던 것 같다. 정기적으로 학교에 왔던 헌혈 버스에 올랐던 건 이제 기억 저 너머에 '추억'이란 이름으로만 자리하고 있다. 학창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이젠 그놈의 SARS-CoV-2 때문에 운영도 못 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헌혈은 중간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얼마간의 공백을 두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이어져 오늘로 27번째를 맞이하게 됐다. 적은 횟수는 아니지만 많은 건 또 아닌데, 이는 내가 성분 헌혈에 비중을 별로 두지 않고 전혈 헌혈만 해대서(?) 그런 것이기는 하다. 솔직히 사람 살리는 데에는 전혈 헌혈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냥 가리지 말고 할걸 싶다. 필요가 없다면 아예 시행하지도 않았겠지. 분명히 어딘가에 쓰임이 있어서 성분 헌혈자를 모집하는 것일 텐데 왜 무엇은 중하고 무엇은 경(輕)하다 여겼던 걸까? ^^;
원래는 오늘 혈장 헌혈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브런치 어플을 둘러보다지정 헌혈자를 구한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인즉 게시자의 매형 되시는 분께서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혈소판 성분 헌혈을 받으셔야 하는 상황으로, A형에 한해서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또 공교롭게도 흔하디 흔한 A형인 나는 바로 종목을 바꿔 혈소판혈장헌혈로 예약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그 호소를 외면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렇게 오늘이 됐고, 너무 오래 걸려 웬만하면 안 하리라 마음을 먹었던 혈소판혈장헌혈을 만 2년 만에 하게 됐다. 혈장과 혈소판 성분을 다 분리하기 때문에 시간이 배로 걸려서 아마 많이는 안 하겠지만 혈소판 생성에 문제가 생긴 이에게는 그 무엇보다 필요한 헌혈. 다행히 결격 사유는 없었는지 주삿바늘은 꽂았다. 혈액팩 위에 적힌 수혈 대상자의 이름을 보니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이 들더라. 예상치 못하게 어려움에 처하신 그분께, 그분을 도울 수 있는 나 자신에게.
성분을 분리하고 혈구를 도로 집어넣기를 꼬박 한 시간, 드디어 헌혈이 끝났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오래 앉아 있어 찌푸둥해진 목과 어깨를 어루만지며 헌혈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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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족을 제외한) 내 주변에는 헌혈을 한다는 이가 전무(全無)하다. 한번은 친구 한 명에게 헌혈을 권유했더니 거절하면서 하는 얘기가 '건강'과 '혈액 단가'였다. 헌혈을 하면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 있고, 한다 한들 적십자사에서 주는 기념품에 비해 상당히 높은 가격으로 혈액을 넘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듣고 조금 황당했다.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의 헌혈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길래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가 싶어서였다. 물론 적십자사에서 이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렇다고 헌혈을 '피 장사'라고 여길 이유는 전혀 없는데 어째서 이 지경까지 왔나 싶어 안타깝더라.
이러한 인식을 방증하듯 헌혈 인구 비율은 근 몇 년간 감소세를 유지하고 있다. 2014년 인구 대비 6.1%였던 헌혈자 비율은 2020년에는 인구 대비 5.0% 수준으로 떨어졌다(E-나라지표, '헌혈인구 및 개인헌혈 비율'). 2020년의 경우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인해 하락한 점이 크긴 하나, 그와는 별개로 꾸준히 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헌혈에의 관심도가 날로 줄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공혈액 제조 연구가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각종 음료가 물을 대체할 수 없듯 피는 피로밖에 대체할 수가 없는 현실을 고려하면 다소 아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사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인정이란 게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취급을 받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일일이 서로의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게 좋다는 뜻은 아니다. 낡은 집단주의의 틀을 벗어나 개인주의란 새 지평으로 나아가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다. 다만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줄어들며 생긴 공백을 그 무엇도 메워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과거로 회귀할 수도 없고, 요즘 사람들이 그걸 바라지도 않으니 별 도리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주의적 트렌드에 부합하면서도 쉽게 인류애를 실천할 수 있는 일로 헌혈만한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에 많은 이들이 동참했으면 좋겠다. 사람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해도 좋고, 헌혈 유공장을 목표로 해도 좋다. 사막을 헤매는 이에게 물 한 모금이 그러하듯, 당신에게서 나온 피와 성분은 살고자 하는 이에겐 생명수가 된다. 당장 내 옆의 누군가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진 않을지언정, 나와 떨어져 있는 어느 누군가는 그 누구보다 내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만약 주변에 도울 이가 눈에 바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헌혈로 누군가를 돕기를 권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흔하게 할 수 있는 숭고한 선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