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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an 29. 2022

난 그 물건을 살 수 없다

무언가에 높은 가치를 매긴다는 건 설레지만 일변(一邊) 부질없는 일이다.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이자 최초의 디지털 세대에 속하는 나는 어릴 때는 카세트 테이프로 구연동화를 들었고, 컴퓨터 시간에 플로피디스크와 CD를 사용했다. 하지만 음악만큼은 달랐다. 이미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MP3 플레이어(흔히 MP3로 줄여 부름)로 음악을 들었다. 이미 대세가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에 카세트 테이프나 CD 플레이어와 같은 기존의 기계로 음악을 듣는다는 건 어려웠고 한편으론 불필요했다.


그런데도 사람 심리란 참 웃겨서, 1천 원도 안 되는 금액으로 음원을 구매하면 곧 그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됨에도 굳이 1만 원에서 2만 원 하는 CD를 사야 성에 찬다. 예전엔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이미 시대적으로는 뒤떨어진 취급을 받는 앨범을 사야만 그 노래가 내 수중에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후에 대체 왜 그런 걸까 싶어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앨범은 눈에 보이고, 음원은 눈에 안 보인다는 것, 그뿐이었다. 현물(現物)인 앨범을 손에 넣으면 이는 곧 나의 소유물로 명확히 인식되지만, 디지털 파일인 음원은 기계로 실행하여 들을 수는 있어도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나의 것'으로 명확히 여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앨범을 구매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앨범 수집에 열을 올렸던 건 가수 김경호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였는데, 그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이들은 모두 CD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므로 만일 내가 그의 CD를 손에 넣는다면 (결코 그럴 수 없음에도) 마치 그때 그 시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게 2010년 <나는 가수다>를 통해서였으니 벌써 10년도 더 된 그의 전성기 시절 앨범을 구하는 것이란 그리 쉽지 않은 일. 어찌어찌 7-9집 앨범은 손에 넣었지만, 결국 1-6집 앨범 구하기는 단념했다. 그걸 구한다고 김경호 아저씨가 날 칭찬해줄 것도 아니고, 그 앨범에다 일일이 싸인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앨범 구하기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그 앨범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것이 귀한 것이지, 그 자체로는 '공산품' 이상의 가치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몇몇 가수의 앨범을 구매하긴 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는 무언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짐으로써 '이것이 내 것'이라 착각하는 허영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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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고 있지만, 막상 환히 웃거나 뇌쇄적인 표정으로 안무를 소화하는 그들의 모습을 때로는 흐뭇하게, 때로는 홀린 듯 보는 것이 사실이다. 좋은 음악도 적잖아서 간간이 찾아듣고는 있는데, 이번달 중순에 '프로미스나인'이란 그룹에서 <Midnight Guest>란 제목으로 발표한 미니 앨범의 수록곡 중 하나인 'DM'을 듣고 '우와!' 했다.

이윽고 고민에 빠졌다.

'앨범 사, 말아?'


장고 끝에 사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MP3 파일로 내려받아 잘 듣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영 아쉬운 느낌이 끊이지 않는 건 내가 이 앨범에 꽤나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증거다. 저 그룹의 팬('플로버')도 아니고 그저 유튜브에 올라오는 관련 영상이나 좀 봤을 뿐인데 그저 공산품에 불과한 앨범을, 그것도 두 가지 버전으로 나와 상술임을 뻔히 앎에도 불구하고 살까 말까를 두고 그리 씨름을 하고 있으니 원. 비슷하게 지난번 가수 아이유의 앨범이 나왔을 때 살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 앨범도 두 가지 버전으로 나와서 다 사면 거의 4만 원에 육박하여 끝내 단념했다. 그래도 그걸 살 생각을 했던 그때의 나란, 참.... 다행히 시간이 흘러 지금은 신경도 안 쓰게 됐지만, 이번 경 아직 신경을 안 쓰기에는 시간이 덜 흘러서 이리도 갈팡질팡하고 있다.


가치를 부여한다는 건 설레는 일이고, 그 순간 나는 그 작업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주인공이 된다. 나의 기호에 따라 무언가는 S등급, A등급, D등급 취급을 받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가치를 확정하는 순간 금세 처지가 역전되어 가치의 노예가 되고 만다. D등급을 받은 대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지만, 나의 판단으로 최상급이 된 대상에는 끊임없는 찬사를 보내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가치를 부여하는  궁극적으로는 개인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시킨다. 어쩌면 이른바 '명품(사치품)'을 구매하는 이들의 심리가 이와 같을지 모른다. 남들이나 좋다 하던 가방, 지갑, 시계, 의류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내게도 명품이 되어서다. 차라리 신경도 안 쓰면 좋으련만, 가치의 노예가 된 이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 그렇게 비싼 것에 눈독을 들이느니 더 가치 있는 일에 몰두하면 좋지 않나 싶으면서도, 나 또한 내가 가치의 노예로 이 세상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것임을 알기에 끝내 자조(自嘲)하고 만다.


난 왜 이리도 외부 대상에 초연하게 살지 못하는 걸까?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히 세상을 대하고 싶다. 그러면 금괴 수십 개를 보아도, 5만 원짜리 100장 다발이 수천 개가 보여도 환장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상대적 박탈감'이란 것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


뭐, 고작 앨범 하나 갖고 고민하는 판에...

아직 갈 길이 멀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Midnight G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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