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혈통적 외국인이자 국적상 한국인으로서 스스로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사는 러시아계 한국인 교육 노동자/연구 노동자'라 소개하는 그를 예전부터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저 친구가 노르웨이에 교환학생으로 얼마간 체류하면서 박노자 교수의 수업을 들었고, 그 이후로 박노자 교수는 종종 나와 그 친구의 대화 소재가 되고는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글이 그러했다.
친구가 보내온 글에 의하면 그는 지극히 사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자신의 신체를 타인에게 드러내야 하는 체육 시간 전 탈의(脫衣)를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감정을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왠지 남들에게 제 맨살, 벗은 몸 보여주기가 거의 병적으로 싫었습니다. 좀 어렵게 이야기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제 '사생활'의 선과 사회가 설정한 집단성의 선이 서로 맞지 않아 불협화음을 냈던 것인데, 저는 좀처럼 남자들끼리 서로 벗은 몸을 보여주어도 되는 사회의 '상식'에 양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 어쩜 이리도 비슷했는지. 나 또한 그러했다. 박노자 교수의 솔직한 고백이 이리도 와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본론은 이게 아니다.
그는 뒤이어 공중전화 부스 얘기를 꺼낸다. (당시) 소련에서 보았던 공중전화 부스는 옛 외화(外畫)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면이 죄다 막힌 형태로서 타인이 자신의 대화를 듣기 어려운 구조였는데,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사면이 막혀 있지 않은 공중전화 부스를 보고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자신의 사적 대화가 타인에게 들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이 신기했던 것 같다. 후에 '소셜 미디어(또는 SNS)'라 하는 페이스북이 등장하고 이 플랫폼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람(가족)의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에 다시금 큰 충격을 받았다며 '사생활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현대 사회의 개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전략)"후기 자본주의의 개인은 '초연결'의 삶을 살면서 그 사생활 관련 제반 권리들을 스스로 반납하곤 합니다. 사생활 장면 하나하나를 SNS에 올리고 남들이 보고 듣는 데에서 휴대폰으로 들으란 듯이 통화하고 늘 휴대폰으로 연결이 가능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동 통신이 혹시나 갑자기 없어지면 그냥 아주 기쁘게 제 젊은 시절의 옛 '정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제 아이들만 해도 휴대폰과 SNS 없이는 아마도 하루라도 살아가기가 힘들 듯합니다. 그런데 초연결 시대의 인간들의 이 자발적인 '사생활 반납'의 저변에는 '고독'의 짙은 그림자가 깔려 있습니다. '페친'들이 수천 명 되고 인스타에서 수십만 개의 '좋아요'를 얻어도, 이 사람들이 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깊이 들어주고 그들을 위해서 뭔가를 내주고 희생할 수 있는 진짜 친구는 한 명도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세계와 '연결'돼 있지만, 누구와도 '친밀'하지 못합니다. (후략)
박노자 교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잘 알지는 못하나, 진성 좌파로 알려진 그가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적으로 볼 리는 없단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바다. 그래서 현대인을 '후기 자본주의의 개인'으로 묘사한 듯한데,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런 관점을 넘어서서 박 교수의 분석은 상당히 유의미하다. 온라인 플랫폼의 등장으로 기존 관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던 사람들이 그곳에 새로이 모이게 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관계에 만족한다면 '굳이' SNS를 이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전제가 깔려 있긴 하나, 그렇지 않다 한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이 결국 '좋아요'로 귀결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단지 나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글을 보고 '좋아요' 버튼을 눌러주길 바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SNS를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사람들이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만 누구와도 친밀하지 못하다 말하고 있다.
다른 말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예인이란 존재는 인간의 숙명인 고독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주체적이면서도 가련한 존재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은 팬에게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지만 정작 팬들은 자신의 모습을 연예인에게 드러낼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박노자 교수의 연결과 친밀에의 지적에 부합한다는 생각도 든다.
나도 SNS를 한 적이 있다. 물론 블로그와 브런치 모두 SNS의 범주에 들지만, 흔히 얘기하는 SNS로 위에 언급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대표적이니 하는 말이다.
10대 때부터 페이스북을, 20대에 접어들며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더랬다. 그러나 2018년, 나는 두 플랫폼을 탈퇴했다. 절대 다수가 '초연결 시대'를 살며 선택이 아닌 거의 필수로 가입했다고 봐도 무방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내 발로 떠난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박노자 교수가 지적한 바처럼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줄 사람', '날 위해 뭔가를 내어주고 희생할 수 있는 진짜 친구'가 과연 SNS에 존재하느냐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웃기게도 이런 생각을 했던 내 SNS 계정에는 모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있지 않았다. 죄다 아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연락을 주고 받기도 했으며 여러 활동을 통해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난 저런 회의감에 계정을 삭제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모순이 아닌가? 그런데 이 자기 모순은 사실 남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비롯되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무슨 말이냐, 마치 전시하듯 조금 더 예쁘고 멋진 모습, 또 그러한 풍경을 찍어 올리는 사람들의 게시물에 기계적으로 '좋아요'를 누르며 '내가 좋아요 버튼을 누른다는 것이 타인에게 그리 정서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될 것이며, 애초에 그들은 내가 좋아요를 누른다는 것에 뭔가 위로감을 얻기는 할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 질문이 궁극적으로는 나를 향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누가 누구에게 관계적 회의감을 느낄 자격이 있겠냐마는, 습관적으로 게시물을 들여다보고 좋아요를 누르는 내 모습에서 타인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는 뜻이다. 내가 그러한데남이 그러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다소 주관적이면서도 비관적인 생각은 과감히 계정을 지워버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목소리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창구'를 찾아 떠났다. 그게 바로 블로그였다.
그리고, 그 작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솔직히 계정 삭제 건은 후회한다.
내가 현실 세계에서 누군가와 진정 소통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상, 가상 공간에서 소통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사실상 망상과 다르지 않다. 다만 있으니 하는 것뿐이다. 새로운 것에 적대감과 동시에 호기심을 느끼는 인간이란 존재는 인터넷이 개발되고 SNS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이것이 과연 '오프라인'에서의 정서·관계적 결핍을 메울 수 있을 것인지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한편 오히려 SNS야말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단 낙관적 관점을 갖기도 했다. 그리하여 (박 교수의 표현에 따라) 이른바 '초연결 시대'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SNS 계정을 만들어 수많은 이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본질적 차원의 교류인지에 대해선 심히 의문이다. 결국 그곳에서 사람들은 '나의 얘기'를 한다. '타인의 얘기'는 그저 '피드'에 뜨기 때문에 볼 뿐이다. 다수가 타인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단 '나의 이야기가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SNS에의 야심찬 포부는 실패로 돌아갔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인터넷을 통해 지역을 넘어 국가를 초월할 수 있게 됐다 한들 SNS에 보이는 모습과 실제 내 모습의 괴리를 해결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에서 인기가 없는 이는 인터넷에서조차 인기가 없다는 사실만을 재확인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현실과 다른 점은 SNS를 통해서는 내가 알고 모르는 이를 '수치'로서 계량화할 수 있단 것인데, 일단 한 번 '팔로잉'을 하면 수가 올라가기 때문에 '내 관계의 영역이 이 정도구나' 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 인식'을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는 주요인이다. 나의 팔로워와 타인의 팔로워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타인의 '예쁘고 아름답게 가꿔진' 일상을 부러워하며 자기 비하의 늪에 쉽게 빠지고 만다. 그리하여 명목상 다른 이와 소통하겠다며 발을 들이민 곳에서 소통은커녕 초라한 내 모습만 발견한 채 상처를 받게 되는, 의도와는 다른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브런치로 옮겨 온 것이 누군가의 글을 진지하게 읽고 그와 소통하겠다는 의도라고만 한다면 그건 솔직히 거짓말이다. 그저 '내 이야기'를 조금 더 글 쓰는 느낌 나는 인터넷 공간에서 하고 싶었을 뿐, 여러 사람의 이야기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마음이 크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럴 여력이 사실 없다. 내가 궁금한 건 내 주변 사람이 어떻게 지내며 또 무엇을 생각하는지인데, 그건 전화나 카카오톡 메시지로 물으면 되는 것이고, 애초에 글로서 이를 알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글쓰기에 취미를 들일 수는 없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결코 충족할 수 없는 바람일 뿐임을 잘 안다. 결국 이런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낯선 누군가를 마주해야 한다. 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는 싶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관계에 방어적이며, 더욱이 온라인 공간에서 모르는 이와 진정한 의미로서의 소통(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관계 수립·진전)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데 다른 이야 오죽할까?
내가 박노자 교수의 글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은 늘, 언제나 세상과 맞닿아 있지만, 그 중심은 결국 '나'다. 나를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사람들은 늘 외로워하고 그렇기에 누군가를 찾으려 하지만, '관계 수립'은 또다른 문제이기에 아예 쉽게 스쳐 지나도 무방한 인터넷 공간의 특성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심지어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특성에서만큼은 예외가 되지 않으며, 혹여 인터넷을 통해 실제로 낯선 이와의 관계가 수립되는 경우가 있다 한들 그것이 SNS를 이용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이용자는 별 것 없어 보이는 스스로의 오프라인 환경과는 달리 뭔가 있는 것처럼 포장할 수 있는 온라인 환경에서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박노자 교수의 글을 통해 나는 현대 사회의 관계란 것이 얼마나 파편화되어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것은 모두의 잘못이면서, 모두의 잘못이 아니기도 하다. 사실 사회가 이렇게 되기까지 모든 사람이 일정 부분 기여한 건 맞는다. 그러나 그들이 의도적으로 기여했다 하기에는 '시류(時流)'라는 것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마냥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세상이 이리 흘러가니 나도 맞춰 살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만, 정말 그것을 원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니까. 다만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려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이렇게 살 따름이다. 이 가운데에서 만족하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다를 뿐이겠지.
아마 내가 브런치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누군가의 글을 구독하지는 않을 거다. 난 내 목적을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것이므로 당연한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하는 개인적 갈망 혹은 인간으로서의 본성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 끊임없이 누군가의 글을 들여다보겠지. 이 모순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며, 그런 존재가 인간임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이 글을 빌려 공감이 되는 글을 써 주신 박노자 교수께 감사 인사를 표한다. 그가 이 글을 볼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말이다.
그가 쓴 글의 마지막 단락을 첨부하며 글을 마친다. 맨 아래에 링크를 붙여넣었으니 글 전체를 보는 것도 좋겠다.
"초연결 사회, 사생활 공유의 '쿨함'은 단기성 위주 삶 속에서의 고독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매분 매초에 SNS을 확인해도 고독을 잊기란 궁극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결국, 원자화의 정도가 높은 노르웨이 같은 사회만 해도, 아마도 20-30년이 지나면 공장 노동자보다 내면이 병든 동료 시민들을 치료해야 할 심리학자와 상담사, 정신 질환 전문가, 그리고 인생코치 등의 수는 훨씬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봐야 이런 사회는 과연 행복해질 수 있겠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