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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Mar 20. 2023

글을 쓰고, 고발하고, 비판했던 이유

지난 3년간의 비인간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2020년 초, 갑작스레 '확진'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던 SARS-CoV-2, 일명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초반에만 해도 '우한 폐렴'이라 불렸던 그 질환은 '그 나라'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국제기구의 주도하에 COVID-19(코로나-19)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그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물류와 인구 이동을 제한한다는 것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더는 자국의 힘만을 의지할 수 없는 21세기에, '감염 위험성'을 이유로 각국은 빗장을 걸어잠그고 함부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가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만약 기후 위기와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인류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의 활동에 강력히 제동을 가했다면 조금이라도 상황은 좋아졌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장기적 생존의 문제는 외면한 채, 바이러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야기한 단기적 생존의 문제로 인해 사상 초유의 통제 및 봉쇄 조치가 자행되었다. 그 모든 것은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함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는데, 검역 단계에서 차단을 실패한 이상 지역 사회로의 바이러스 확산은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칭 '공동체주의자'였던 과거의 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RNA 바이러스의 특성상 변이를 활발히 일으키며, 이런 바이러스의 경우 전파 속도는 빠르되 치명률은 그에 반비례한다는 매우 기본적인 과학적 사실은 모른 채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해 '모두'의 자유와 권리는 당연히 제한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연스럽게 영위해 왔던 일상을 포기하길 바랐으며, 솔선수범이라도 하듯 나 자신을 집에 가두었다. 과연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파악조차 않은 채, 이를 대가로 하루빨리 기존에 누려 왔던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정부와 언론에서 연일 떠들어대는 '위험하다'는 말을 굳게 믿은 채 나라는 인간의 존재성을 억눌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 해가 갔고, 또 다시 한 해가 갔다.


안타깝게도 과거의 나는 너무나 천진난만했으며 순진무구했다. 권위는 더 이상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아야만 의미를 지님을 매우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위기 상황'이라고 인식되자 진지한 고찰 없이 권위체의 지침과 명령을 따랐다. 그 모든 것은 다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기대 말이다. 그러나 바이러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몰랐던 나와 수많은 이들은 이 사태를 정부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미 검역 단계에서 차단에 실패하여 지역 사회로 확산된 이 바이러스를 각종 규제와 통제로 마치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 생계 수단을 잃은 이들의 호소, '감염 우려'를 이유로 수용을 거부당해 응급차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가족의 읍소를 '아프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감내해야 하는 상황' 정도로 생각했으며, 다른 나라에서 '일상을 돌려 달라', '통제 조치에 반대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개된 여러 규모의 시위를 두고 '저 극우 멍청이들의 반공동체적 준동'이라 비난했다. 바이러스라는 악마와 싸우기 위해 총력을 다해야 한다 외쳤던 나야말로 어느 순간 악마가 되어 있었음을 그때의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한국인이 보였던 태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인간은 억압이 지속되면 언젠가 반드시 이에 항거하여 자신의 자유를 찾는 존재다. 그러므로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해 인신의 자유와 기본적인 권리를 중장기적으로 제한하는 상황이라면 일반적으로 이에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와야 맞는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판정에 하루가 걸리는 유전자 증폭 검사(PCR)는 단순히 특정 시간대에 감염자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감염에 효과적이라는 마스크를 모두가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를 검사 대상자로 규정했다. 이처럼 비합리적인 조치가 계속되었음에도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왜? 이미 '위험'과 '위기'라는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단어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독재 국가에서나 하는 게 세뇌가 아니다. 어떤 사회든 간에 전방위적으로 일관된 구호가 지속적으로 전해지면 사람들은 이에 익숙해져 그것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 기본적인 원리조차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현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묵살했고, 그들을 비난하고 인신공격했으며, 심지어는 음모론자라는 낙인을 찍어 매장하려 들기까지 했다(물론 검증되기 어려운 주장을 펴는 극단론자들이 분명 있었고, 지금도 있다). 하지만 이는 다수가 이미 통제라는 방식에 완전히 익숙해져 이것이 아니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거의 종교적 신앙 수준의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장기간 이어진 통제와 타인에 대한 마녀사냥이 과연 한국인을, 한국 사회를 바이러스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주었는가?


언제 끝날지 모를 비상 시국과 위기 상황에 의문을 느끼고 정책적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당국의 강한 제재 때문이 아니라 지속된 통제 조치 과정에서 상호간신뢰가 산산조각났기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이를 잠재적 감염원으로 간주하여 의심하고 기피하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는 일상을 회복할 수 없다며 전향적 조치를 요구하는 이들을 가만히 둘 한국 사회가 아니었다.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신뢰가 필요한데, 그 신뢰 발의 최소한의 요건(또는 양태)문제를 제기하려 떨쳐 일어나는 타인에 대한 묵인이다. 적극 동참하지는 않을지라도, '이건 잘못됐다' 하고 외치려는 이가 제재당하지 않게 그냥 두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된다.

그러나 결과는 알다시피 이 모양 이 꼴이다. 분연히 일어나 정부의 무의미한 조치에 반대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려는 이를 사람들은 묵인하거나 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왜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느냐'라며 사적 제재를 가했다. 지난 2014년, 300명의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여 어떤 상황에 처해졌는지 아는 이들이, '더는 이대로 살 수 없다' 외치는 이들을 억눌렀고, 그렇게 이 나라는 세계 최장기 방역 & 마스크 착용 강제국의 반열에 올랐다.


다시 묻는다.

그래서 바이러스 확산이 완벽히 차단되었는가?

그리하여 한국은 가장 먼저 '엔데믹'을 선언한 국가로 자리매김했는가?


왜 대체 정부는, 방역 지지자들은, 바이러스를 무서워하는 이들은 이 문제에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는가?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비겁자다. 질병관리청 건물 앞에서 노숙을 하며 방역 중단을 주제로 1인 시위를 하지도 않았고, 한때 '백신 패스는 백신 불접종을 택한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기에 백신 패스 반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마스크 착용 강제 반대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정부와 사회를 향해 비판이란 이름의 욕설을 쏟아내었을 뿐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라는 책의 저자가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비록 그와 나의 정의는 다르겠지만, 정의 실현을 위해 적극·주도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같은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마스크를 벗어던져야 한다고 생각한 후로도 버스에서 간혹 보이는 마스크 불착용자에 대해 '저 사람 왜 저래?'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을 보며 무섭기까지 했으니 이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가?


어쩌면 이 시점에서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외쳤던 마스크 의무화 조치가 '부분적'으로나마 폐지되었기에, 이젠 되었다며 글쓰기를 중단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겁과 위선을 무릅쓰고 열과 성을 다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유는, 모두를 위한다는 행동이 오히려 모두를 얽매고 괴롭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문제 의식 때문이다. 무엇보다 되찾을 수 없었던 일상을 명목으로 내가 스스로 무너뜨린 과거의 내 일상을 위해, '공동의 목표'로 인해 철저히 파괴된 개개인의 존엄과 자유, 권리를 위해, 그 과정에서 산산조각나다시피 한 사회적 신뢰를 위해서라도 나는 글을 통해서나마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 했다.


그 어떤 조치도 한국인에게 '팬데믹 이전의 일상'을 되돌려주지 못했다. 그토록 비난했던 다른 나라의 경우, 지속된 항거와 쟁의로 믿지 못할 만큼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으며, 방역의 흔적을 찾기 힘들 만큼 옛 모습을 되찾은 지 오래다. 그런데도 '우리가 옳았다'라며, 차단하지도 못했던 바이러스를 막겠다고 취한 각종 악성 조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것이 진정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인가? 장기간 부과된 의무를 내면화하여 이제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각종 이유를 다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자랑스럽게 K방역의 성공 따위를 운운하려는가?


국가는 개인과 사회에 했던 약속을 저버렸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조치를 중단하고 전 국민적 불안감을 잠재우는 한편 무슨 병에 걸리건 간에 위중증으로 이행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수용할 병상만 확보했으면 됐다. 그러나 이미 퍼질 대로 퍼져 언제 어디에서 감염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바이러스를 걸리기만 하면 죄다 죽어나가는 것처럼 공포를 조장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깊은 두려움을 심어놓았다. 이래도 한국의 방역이 효과적이었나? 한국 이외의 각국이 강력한 통제 조치를 취하지 않아 멸망 직전까지 갔나? 아무리 생각해도 옹호할 근거가 없는데 대체 뭘 위해 이리도 오랫동안 마스크 하나로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카페에서 지인과 마스크 벗고 앉아 신나게 담소를 나누고, 식당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으며 침을 튀기는 건 그들에 대한 예의였고?


나는 한국 사회가 지난 3년간 보인 위선과 무지, 폭력과 맹목적 태도에 환멸감을 느낀다. 이는 동시에 과거의 나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다. 그렇게 책임자 색출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방역으로 개판이 된 사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물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만만한 사람들에겐 온갖 비난을 쏟아내되,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잘못도 묻지 않고 순종하는 성품을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 모든 부정적이고도 파멸적인 행태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의식'으로 포장되었다는 것에 구역질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토록 정부와 공무원 욕을 해대면서 정작 정부의 진두지휘를 일사불란하게 따랐던 사람들, 이게 한국과 한국인의 현주소가 아닌가?


누차 강조하건 공동체나 집단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 심지어 존엄마저도 무력화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횡행하는 사회는 필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어 있다. 이 나라의 각종 폐단이 그 몹쓸 집단주의로 비롯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모든 이들이 해묵은 박정희-전두환 시대의 군인 정신(=하라면 해!)을 함양하길 바라는 한국 사회. 이런 나라에 장밋빛 미래가 있다 생각하는 사람 바보 멍청이다. 방역은 그야말로 집단주의가 극대화될 경우 어떤 파국적 결과가 도래하는지를 보여준 전례 없는 21세기의 대사건이었고, 한국 사회의 악습이 집약된 폭거였다. 이에 대한 반성-단순히 방역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방역 과정에서 절대 다수가 보였던 행태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에 대한 그 어떤 고민도 의미가 없다고 단언한다.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나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 무슨 아름다운 미래가 있으랴?


내 삶을 지키기 위해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나 권위체의 명령 따위가 아니라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이성의 힘, 그리고 다른 이에 대한 믿음이다. 인류가 과연 공동체의 번영과 집단의 안녕을 위한답시고 개인을 진정으로 존중한 적이 얼마나 되나? 인간은 줄곧 그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눌려 스스로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살아 왔다. 비로소 자유-민주주의(*강조 :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님) 체제가 성립하여 내가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여전히 집단주의의 망령이 우리의 곁을 배회하며 '나'에 대한 고찰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누군가가 목숨과 신념을 걸고 쟁취했던 자유와 권리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지 않은 채 온전히 보존-전승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방역은 인류가 힘겹게 쌓아 왔던 모든 정신적 가치를 일거에 무너뜨린 난행(亂行)에 지나지 않았다.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어 도무지 뭐를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시대에야말로 자유와 권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개개인의 존엄조차 무시될 수 있는 사회가 언제고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지난 3년간의 시간을 통해 맛보기 수준 이상의 경험을 하였으니, 이러한 망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하루빨리 한국의 양대 정치 세력 모두 제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것뿐이다.




정부의 조치 덕에 '병원/약국을 제외하고는 마스크를 안 써도 된다'라고 좋아할 때가 아니다. 아직도 권력자들의 논리에 의해 나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다는 것에 분노를 느껴야 한다. 그런 존재가 시민이고, 그것이 시민성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무작정 가짜 뉴스 유포자에 음모론자로 단정지을 게 아니라 귀와 마음을 열고 다른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진지하게 들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나 그래라' 할 게 아니라, 당장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리할 생각조차 없으면서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유토피아는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


부디 한국인들이, 한국 사회가 (어쩌면 이뤄지지 않을 기적일지는 몰라도) 전면적으로 각성하여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 한 사안에 하나의 답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림으로써 여러 대안을 고려할 줄 알고, 그에 대개인의 선택 온전히 인정고 보장는 곳이 되기를, 과연 그렇게 될까 싶은 마음임에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근 몇 년간 절실히 깨달은 바를 적으며 글을 마친다.

"침묵은 이 사회에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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