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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14. 2023

엇, 없어졌네?!

작은 도시에서 발견한 민국(대만)의 흔적, 사라지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다른 도시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특징적인 장소가 몇 곳 있다. 그게 뭔고 하니, 바로 '대만'이라 불리는 중화민국의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걸린 곳이다.


그 깃발이 어디에 걸려 있느냐, 궁벽한 곳에 자리잡은 화교학교(아직도 있었다!)에 하나, 4년 전쯤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음식점에 하나, 마지막으로 시내의 한 호텔에 하나, 이렇게 총 세 곳에 있다.


…최근까지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국내의 화교학교야 열에 아홉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의 편제를 따르기 때문에 저 기(旗)가 걸린 것은 당연하고, 저 '음식점'의 경우 대만 & 한국 출신의 부부가 운영하는 '대만 식당'이라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독특하게도 호텔에서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깃발이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걸어 놓았더라. 서울도 아 이 중소 도시에 대만에서 오는 여행객이 있긴 있나 싶은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대만 국기를 걸어놓았던 걸까?


2년 전인 21년 여름, 그 뜨거운 날에 굳이 카메라 가방을 둘러멘 채 도심지를 배회하던 중, 잘 안 가는 곳에 한번 가 보자는 생각으로 움직였다가 우연히 저 호텔을, 그리고 저 깃발을 발견했다. 대학 생활을 할 때부터 대만에 대한 관심이 폭증해 '대만 사랑꾼'이 된 나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또 반가워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로 2년이 지났다.


인근(이라 하기엔 1km가 넘긴 하지만…) 카페에 책을 읽으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문득 그 호텔 생각이 났다. '어차피 조금만 가면 나오니 깃발 구경하고 가자' 싶어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나라도 아니건만,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목이 말라 힘겨워하면서도 꾸역꾸역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드디어 호텔에 근접했다. '아, 이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잔뜩 기대감을 품고 호텔 앞에 도착한 찰나,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어?

어…?

어?!'

……

뭐야,

왜 없냐???

어디 갔냐???


내 눈앞에 있었어야 할, 바람에 펄럭이는 채로 나를 반갑게 맞이했어야 할 중화민국 국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 오성홍기가 대신한 였다.

설마 진짜 없는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내가 찾던 그 깃발은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결국 김이 빠질 대로 빠져버린 나는 아쉬움을 안고 집으로 향해야 했다.




서울에 있었을 때조차 대만, 그러니까 중화민국 국기를 본 게 한 손에 꼽을 정도로 한국에서는 저 깃발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중구 소재 모 호텔에 하나가 걸려 있었던 게 다였던 것 같은데, 특이하게도 재학 당시 여러 나라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학에 진행됐던 '국제 하계 학기' 당시, 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국기를 현수막에 인쇄해서 걸어 놓았는데 그중 하나가 대만 국기였다. 사실 외교 문제로 인해 민간 차원에서조차 이 국기를 잘 안 걸어서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언젠가 대만에 갔다가 알게 된 현지인 친구가 한국에 여행을 와서 그 광경을 보여주니 아주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만이란 표현주 입에 담지만 '중화민국'이란 표현을 의도적으로 더 쓰는 편이다. 흔히 우리나라가 '남한'이나 South Korea로 불리지만 공식 국호는 대한민국인 것처럼, 대만 또한 대만 섬이 주요 지역이라 대만이라 불릴 뿐,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좀 된 얘기다) 대만의 한 언론의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한국인이 한국을 '대한민국'이라 부르지 않으면 화를 낸다'는 허황된 소리를 하며 그냥 '한궈'라고 하면 될 것을 '따한민궈(大韓民國)'라고 한 적이 있는데, 정작 대만을 '중화민국'이라 부르는 한국인에겐 그들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을 혐오해서 일부러 중화민국이라 하는 이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웃긴 건, 정작 대만에서는 '중화민국'이란 표현을 그저 정부나 공식 석상 또는 문서에 언급하는 정도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만약 현지인이 '중화민국'이란 말을 실제로 입에 담을 경우, 그는 곧 '중국국민당 지지자'로 간주, 그야말로 '수구꼴통' 취급을 받는다. 이는 대만에서 중화민국이란 국호는 사실상 사어(死語)임을 방증한다.


안 그래도 터넷 사이트를 열람하던 중, 글로 이런 고민을 토로한 이 있었다.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그는, 모친 지인의 소개로 초중고 12년을 인천 소재 화교학교에서 보냈고, 대학 생활도 대만에서 했다 한다. 아무래도 중화민국이 곧 중국이었던 시대에 그쪽 교육을 오랫동안 서 그런지 이 나라에 대한 강한 애정과 향수를 갖고 있는 듯했는데, 정작 현지에 정착한 후 그런 자신의 생각을 현지인에게 말하니 대만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좋지 않았고, 본인은 대만을 존중해서 '중화민국'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데 정작 그곳 사람들은 이를 원치 않는 수준을 넘어 이상하게 생각한다며 한탄스러워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례를 한국에 적용하면 어떨까?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온 외국인이 현지를 존중한다는 이유로 매번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사용한다면 한국인 입장에서도 '굳이…?'란 생각을 할 수 있고, 심지어 그가 남북한을 두고 "남한은 공식 국호가 아니니 대한민국이라 해야 하고, 북한 또한 마찬가지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해야 합니다. 두 국가는 엄연히 다른 나라에요."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대체 이 사람 뭐길래 이렇게까지 말하지?' 싶을 수 있다.


그래도 대한민국 사람이란 정체성을 갖고 있는 한국인과는 달리, '중화민국'이란 국호는 대만 사람들에게는 친근하면서도 낯설다. 나라 이름은 중화민국이라지만 시간이 흐르며 중국 정체성이 거의 옅어졌고, 이젠 스스로를 일러 '워스타이완런(我是臺灣人, 나는 대만 사람이다)'이라 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자국민이 민국 타령을 해도 별로 보기 좋지 않건만, 외국인 주제에 왜 자꾸 불편하게 '중화'를 입에 담느냐고 할지 모른다. 기껏해야 언론 매체에서나 '중화'란 표현을 사용하고,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여한 자국 선수들에게나 '중화팀'(중화대, 中華隊)란 말을 쓸 뿐 평소엔 '타이완'이란 명칭만을 쓰는 현지인에게 중화민국을 운운하는 건, 대만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에 반할뿐더러 적잖은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국가 주권과 정체성을 폄훼하는 것으로 인식될 소지가 다분하다.


대만을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말하자면, 나는 대부분 대만 사람들처럼 현지 보수 강경파의 '하나의 중국'에는 비판적이다. 이미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공산당의 인민공화국에 완전히 점유당해 더는 중국국민당(또는 다른 보수 정당)의 '하나의 중국은 바로 중화민국'이라는 입장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만이 현행 헌법을 개정하여 중화민국의 관할 영토를 타이펑진마(臺澎金馬, 대만-펑후-진먼-마주) 지역으로 한정짓는 쪽이 그나마 가장 이상적이지 않나 싶지만, 이는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을 반대하며 중공의 야욕을 경계하는 서방 사회 입장에서도 (평화적 방식이라 한들 '현상 변경'에 해당하므로) 수용하기 어려운 방안이며, 무엇보다 중화민국을 지지하는 전 세계 각지의 화교가 이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현 중화인민공화국 영토보다 조금 더 넓은 지역을 명목상 관할 구역으로 규정한 현행 중화민국 헌법이 유지되면서도, 국제 사회로부터는 CHINESE TAIPEI(차이니즈 타이페이), 그나마 TAIWAN으로 불리는 아주 애매한 처지에 있는 게 그나마 대만에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다. 달리 말하면 선택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023년 현재, '대한민국', 곧 남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통일에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통일을 외치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흘렀고, 저 북한이라 하는 '조선'의 대외정책이 날로 공격적이라 도무지 정을 붙일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조차도 북한을 더는 북한이 아닌 조선이라 부르는 쪽을 선호하는데, 이것은 현행 헌법 개정 여부와는 별개로 남북이 별개의 국가로 취급받는 현실에 더 부합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처사다.

이런 정서가 팽배한 상황에서 어떤 외국인이 '통일 한국'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남북 통합의 당위성을 주장한다면? 통일의 당위성을 교육받아온 이상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겠지만, 대북 정서가 매우 나쁜 현 상황을 고려하면, 그가 외국인임을 문제 삼으며 남의 나라 일에 함부로 간섭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외국인이 아니라 한들 못마땅하게 볼지도.). 그만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다르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마찬가지다. 나조차 외국인이 통일 운운하면 부담스럽거나 거부감이 들 텐데, 대만 사람이 '중화민국 만세' 타령하는 외국인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는 솔직히 뻔하다. '쟤 국민당이네.' 아니면 '중국에 나라 팔아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다.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현 상황상 국제관계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대만 사람들의 국가 정체성 인식 문제다. 분명 공식적으로는 리퍼블릭 오브 차이나(Republic of China)의 국민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타이완(TAIWAN) 사람으로 간주되며, 스스로도 대만 사람(TAIWANESE)라 여기는 그들. 어쩌면 '중화민국'은 껍데기만 남았을지 모르고, 그런 맥락에서 중화민국을 열렬히 부르짖는 현지인이나 몇몇 외국인이 현실을 모르는 수구주의자로 찍혀 비난받는 건 또한 당연할지 모른다.


차라리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같이, 비록 공통적인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결국 별개의 국가로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듯이, 남북 두 나라와 양안 두 국가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이는 터키Türkiye 근처의 작디 작은 섬 '키프로스'를 양분하고 있는 두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말로는 통일을 외쳤지만 정작 이를 근거로 제 권력을 강화해 왔음을 역사가 보여주지 않았나. 이를 볼 때, 국가와 정치, 그리고 권력이 존재하는 한, 인간에게 평화는 그저 꿈에 불과한 걸까 싶어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어딘가로 사라진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그리며, 실은 '꽤,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는 대만 사람들이 애처롭게 느껴진 건, 그들이 '우리'와 참으로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대만 사람들은 그 어떤 외부세력의 간섭 없이 언제쯤 자국의 명운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지, 언제쯤 우리 한국인은 핵무기와 확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리고 진정한 평화와 공존, 민주와 자유의 가치는 언제쯤 빛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 서너 장은 찍어두는 건데….

호텔에서 내려간 그 청천백일만지홍기,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호텔에 걸려 있던, 이젠 보이지 않는 그 깃발.

글을 마치니 더 대만에 가고 싶어졌다. 그곳에서 잔뜩 펄럭이는 저 깃발을 실컷 보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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