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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17. 2023

바야흐로 대(大)공감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유명 애니메이션 <원피스>는 이른바 '대(大)해적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설명하면서 시작다.

해적왕이라 불린 골 D.로저, 그가 처형 직전 자신이 숨겨두었다는 보물 '원피스'의 존재를 언급하자 사람들은 이에 홀린 듯 해적이 되기로 하였고, 그들을 막기 위해 세계정부의 해군이 출격하면서 해적과 해적의 싸움, 그리고 해적과 해군의 쟁투가 벌어진다.


이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관건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때, 적어도 이 한국 사회를 위주로 보자면 아무래도 '공감'이지 않나 싶다. 함께 공共, 느낄 감感을 쓰는, 너와 내가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 단어. 사랑처럼 달콤하고 평화처럼 아름답다.

어찌 보면 상당히 일상적인, 그래서 소소해 보이는 이 공감이 왜 '시대를 설명하는 단어'의 반열에 올랐느냐 말한다면, 적잖은 한국인이 누군가로부터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감, 누군가가 뭐라고 떠들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얘기할 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렇구나." 한 마디 하는 것이 공감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형태가 아닌가? 그런데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니, 대체 왜?


지난 수십 년간, 소위 인류 사회의 발전이라는 것은 타인의 처지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공감함으로써 이뤄져 왔다. 저 사람이 뭔가 남들과 같아 보이지 않는데, 그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면? 그런데 그게 비단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라면?

이러한 문제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사회 내에서 '약자'나 '소수자'라 불리는 이들의 권리 신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한때는 인식과 법 체계로부터 외면당했던, 분명 인간이어야 함에도 인간 대우조차 받지 못했던 이들이 이러한 목소리를 힘입어 체계 내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처지가 그러함을 인지하는 것에서 끝났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를 넘어서서 '공감'해야만, 즉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 사람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아야만 변화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양 식(式)으로는 이를 역지사지(易地思之)나 추기급인(推己及人)이란 성어로 표현할 수 있다. 역지사지는 '처지를 바꾸어 그(사람)와 같이 생각하라'는 뜻이고, 추기급인은 '나를 미루어 그 사람에게 미친다(여기서 미친다는 당연히 동사다. 영어로는 'reach' 정도.)'는 뜻으로, 두 말 다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말고 상대방에게 둠으로써 그의 생각이나 감정이 어떠한지를 헤아리라는 의미의 격언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관건어(키워드)'가 공감이다? 이는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상황이나 처지를 '그'의 입장에서 잘 헤아리지 못하고/않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도 공감을 원하면서, 정작 공감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 상황, 과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보건대, 마음에 다들 불꽃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불꽃 아래엔 장작이 있다. 다만 평소에는 그 불꽃이 화마(火魔)로 번져나가지 않도록 숨구멍 몇 개 뚫린 덮개로 덮어 두는데, 조그마한 계기만 생기면 (그 계기가 합리적인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언제 그랬냐는 듯 이 덮개가 날아가버리고, 간간히 세를 유지하던 불꽃은 그새 큰 불이 되어 나와 남을 덮친다. 그렇게 사인(私人)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며, 심하면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구타하여 중대한 상해를 입히거나 그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다. 비단 한국인의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으나, 뭔가 내가 느낀 바는 이렇다. 분명 평소엔 '품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데, 결국 그마저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단 안간힘을 쓰는 느낌이라, 무슨 일이 하나만 생겨도 그 노력이 와르르 무너져버려서 내가 내가 아니게 되거나, 내가 진짜 나(진아眞我라고 할까?)로 돌변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이다.


분명 이유를 찾으라면 개별 사례마다 이유를 찾을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사람이 내면의 불꽃에 휩싸이는 이유는 비슷하다.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저 사람이 나의 상황이나 처지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일순간 맹수로 돌변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무시와 존중은 상반되는 행위지만, 이해와 공감을 공통 요소로 갖고 있다. 무시는 그 두 가지가 결핍될 때, 존중은 충족될 때 나타나는데, 상대방이 실제로는 그를 무시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그렇게 느끼는 순간 언제고 품고 있던 칼을 꺼내 그에게 겨누게 된다. 그만큼 이 감정적 공유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느냐, 그것을 포기하게 되느냐를 가르는 핵심 요소라 하겠다.


정(情)의 민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한국인이다. 뭐, 이젠 그 정이란 것도 몇몇 사람에게나 국한되는 옛 이야기로 전락된 지 오래라 개인적으로는 저 정 타령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정답다', '정겹다'와 같은 단어가 주는 흐뭇함과 왠지 모를 뿌듯함은 늘 나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준다.

관건은, 한국인이 이 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정'이란 것이 마치 신화적 서사처럼 한국인을 같은 이름으로 결집하게 하는 공통분모로 작용해 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우리는 정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공통 인식이 있(었)다면, 확실히 이를 잃어버린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굳이 저 공감이 시대의 관건어로 등장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왜 그리도 한국인의 마음에는 불꽃, 그러니까 분노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담겨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건대, 이는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을 참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뭘 참아 왔냐고?

'국가와 사회의 부각을 위해 개인 존재의 표출'을 참아왔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욕망은 있었으되 감정은 없었으며, '우리'는 있었으되 '나'는 없었다. 욕망은 개인의 것이지만, 그것이 모이면 집단의 것이 된다. 한국인의 욕망은 이처럼 분명 개개인의 것에 해당했지만, '국가 재건'이라는 거시적 목표 아래에서 집단적으로 조직되었다. 분명 '모두'가 욕망을 발휘했지만, 그것이 '민족의 중흥', '가문의 흥기(興起)'와 같은 집단주의적 기치로 이뤄지다 보니, '나'의 욕망은 이에 가려져야 했고, 오로지 '경제'만이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그밖의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불필요함과 사치로 치부되었다.

나라의 발전이 곧 나의 성공이라는 명목으로 물질적 차원의 욕망만이 극대화되다 보니, 사람들은 이 인간 본연의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결핍을 마치 물질로 충족할 수 있을 것이란 집단적 환상에 빠졌다. 슬프게도 한국인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금전적인 가치를 삶에 있어 우선순위로 여긴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데, 행복이 돈과 연결된다는 인식은, 말은 현실적인 이유라지만 그 연원을 따져 보면 사실 위장된 이유에 불과하다. 정말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까? 당장 돈이 많으면 행복할지 모른다. 문제는 모두가 많은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돈을 확보하기 위해 당장의 고됨과 불행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는 점이다. 돈이 좋다 말하는 이들은 당연히 돈을 많이 갖고 있거나, 당장 본인에게는 돈이 충분치 않아도 누군가가 돈 덕에 즐겁게 사는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확보한 사람들이 왜 무욕의 경지에 도달하기는커녕 끊임없이 자본 축적에 골몰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재물이 가져다준 여유는, 그것이 적절히(이마저도 상대적이지만) 유지될 때에야 비로소 유지된다.

그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살 만한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돈 돈 타령하는 건, 어쩌면 그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마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늘 품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


'돈'은 나의 소득 및 생활 수준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 '나'를 드러낼 수는 없다. 돈이 나고 내가 돈이면, 도대체 나는 뭐고 돈은 뭘까? 나는 인간이고, '인격체'라는데 내가 돈이면 돈도 인격체? 이 무슨?

돈은 결코 '자아 표출'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가 없다. 그저 내가 이 정도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일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자아 표출로 오인되게 할 만큼 돈의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산 축적 정도를 곧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인간을 서열화한다. 그렇게 모든 인간이 재산으로 줄세워지는 사회에서는, 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민주사회'에서조차 '만인은 평등하다'란 가치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거니와, 실현될 수도 없는 가상의 가치일 뿐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오직 돈이라는 가치만이 남는다.


그럼 대체 '나'는 어디에?

나는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하고도 23년째 되는 해를 살아가는 수많은 한국인이 겪는 공통 난제라고 생각한다. 자본과 금전이 '나', 곧 자아를 결정하는 줄로 알았던 이들이, 실제로는 금전의 결핍으로 허우적대고, 그렇게 '나'를 잃어버렸다. 이제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어? 돈이 나의 나 됨을 결정하지 않네? 그럼 대체 나는 누구야?'

집단적으로 상실해 버린 자아정체성, 그리고 그것이 결코 돈에 의해 결정될 수 없음을 인지한 사람들. 그들이 겪는 공백은, '나'란 존재에 대한 고민은 늘 뒷전으로 밀린 채, 그저 열심히 살고 돈 벌어서 집 사고 차 사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 성공한 삶인 줄로만 알았던 인식이 불시에 깨져버렸음을 의미한다. 거기에 '나'는 없다. 어떤 삶이 더 괜찮은 삶인지, 더 가치 있는 삶인지를 고민해야 했는데 그것이 너무나 오랜 시간 허용되지 않았다. 그 정신적 아노미 상태를 이제서야 맞이한 사람들은,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지만, 이젠 너무나 높아진 각종 사회적 장벽 앞에 무력하게 서 있게 되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물질적 목표의 달성을 성공과 동일시하며 스스로를 돈에 미친 괴물로 몰아간다. 앞의 이들에게는 공감할 여력이 없고, 뒤의 이들에게는 공감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대공감 시대'를 맞이하였음에도, 정작 타인에게 공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다.

한국인은 타인의 처지에 공감할 만한 여유를 거의 잃어버렸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그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며 몰감정을 요구한다.

인간의 기계화라는 것이 이런 게 아닐까?




내가 누군가의 처지를 이해하고, 또 이에 공감하고자 나의 마음을 끌어올 수 있으려면, 반드시 스스로의 마음에는 타인을 감싸안을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내게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이의 마음을 나눠 가질 수 있겠으며, 그에게 여유가 없는데 어찌 내 마음을 나눠 가지려 들겠는가? 나는 이것이 바로 공감이 현대 한국 사회의 관건어가 되었음에도 정작 처절하게, 또 철저하게 실패한 이유라고 본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으니 그 조그마한 불꽃이 쉽게 화마로 번질 수밖에. 물질적 풍요로움이 인간의 삶과 정체성마저 좌우한다고 배워 왔던, 사적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역대 모든 공산주의 국가보다 더 유물론적인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끝내 스스로를 탈진 지경에 몰아넣음으로써 도무지 조금의 여유조차 갖기 어렵게 해 버렸다. 삶에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 특히 '일'을 통해 뿌듯함을 느낀다는 것이 과연 많은 한국인에게 가당키나 한 얘기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이에 부정적이다. 본인의 의지를 막론하고 뭔가를 하는 사람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늘 불안해하는 사회가 이 한국 사회 아니던가.


수많은 해적이 이 대해적 시대에 '위대한 항로'를 향해 돛을 올렸던 것처럼, 수많은 한국인은 이 대공감 시대를 맞이하여 '공감받는 삶'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무한 경쟁 상태에서 숨겨진 보물 '원피스'를 차지할 사람은 결국 정해져 있듯,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진정 공감하고, 또 공감받음으로써 위로를 얻는, 그리하여 살아갈 힘을 축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분위기에서는 절대 쉽지 않다. 날마다 여러 권의 공감 에세이가 출판되어 베스트 셀러 목록에 그 이름을 올리지만, 정작 사람들은 늘 감정에 메말라 있고, 공감에 허덕인 채 이 괴로운 하루가 빨리 지나기를, 저 괴로울 하루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공감의 실패'가 아니면 무엇일까?


사회는 냉혹하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장악돼서는 안 된다고도 말한다. 그럼 대체 뭐가 맞는 걸까? 이 현실을 고려하면, 오히려 뒷말은 틀리고 앞말만 맞는 것 같아 보인다. 뭐만 조금 잘못하면 상전이 노비 대하듯 욕을 먹어야 하고,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으며, 관용과 이해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런 나라에서 무슨 그런 이상론을 펼 수 있을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는 경제 발전을 대가로 물려받은 과거의 유산이다. 유산은 찬란해야 할 텐데, 그렇기는커녕 무슨 암덩이나 다름없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더 빨리 달성하고자 모두가 포기하기를 강요당했던 '인간다움'이란 가치는, 이제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음에도 좀처럼 이를 손에 넣기가 힘든 상황이다. 그러니 이 감정이라는 것이 무조건 표출되어서는 안 되는, 늘 감춰져 있어야만 하는 대상 취급을 받는 것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곧 남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이란 날선 논리가 횡행하는 게 아니겠는가?


오히려 감정은 드러낼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동물권 개념이 '쾌고감수능력'을 기반으로 제기되긴 했지만, 인간의 감정과 동물의 감정이 그래도 다른 것은, 모든 동물이 '공감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는 다르게 모든 인간은 이 공감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종종 제 주인에게 다가와 폭 안기는 개나 고양이를 보면, '아, 저 친구들에게도 감정을 나누는 능력이 있구나.'란 생각이 들어 절로 흐뭇해진다. 그런데 사람은 '공감하지 못할 때'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거나 뒷담화의 대상이 된다. 왜일까? 이는 공감이 인간에게 있어서 능력일 뿐만 아니라 기본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메마른 존재를 원한다면 로봇을 찾으시라. 그리고 모든 일을 로봇에게 맡기시라. 그 어떤 감정 기복 없이 주어진 업무를 십분 수행할 테니. 하지만 그 자리에 인간은 없다.


공감의 시대에 공감이 실패했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 역시나 결함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감의 필요성을 무력화할 만큼 사회가 중대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반드시 감정이 있어야 한다. '감성팔이'라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정(情)이 결여된 결단이 인류를 전쟁의 늪으로 몰아넣었음을 기억한다면, 감정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 문제는 감정을 요구하는 인간이 아닌, 감정을 감출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 있다.


난 언제쯤 진정한 공감의 시대가 이 나라에 도래할지 모르겠다. 아니, 언제쯤 이 공감의 시대가 그 핵심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너무나 지쳐 있다. 그런데 이를 외면하고, '사회 유지'를 위해 제 삶과 영혼을 쉬지 않고 투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진정 인간적인 처사일까?

이 시대의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실로 여유다. 마음에 남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을 직시할 상황이 보장되어야 하고, 다른 이의 심정을 들여다 볼 마음이 들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금지하는 사회는, 미안하지만 지속될 가치가 없다.


'이러다가는 다 죽는다'.




최종수정 : 2023.06.1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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