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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28. 2023

하나만 강조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관점을 지닌 이들의 폭력성

그 문제는 바로 보편성의 상실이자, 넓은 시야의 포기다.

한 가지 주제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는 이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주개념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려 한다. 다른 어떤 시각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과 같다.

고대 중국의 고사(故事) 중맹모상/맹인모상과 같은 이치다.

두루 볼 줄 아는 것이 그나마 전체에 가깝다. 어찌 하나로만 규정할 수 없는 것을 하나의 틀에 맞추려 할까?


자본주의, 공산주의, 보수주의, 진보주의, 기독교, 이슬람교, 무신론, 페미니즘, 탈권위주의, 원리주의, 엘리트주의, 대중주의, ……

인간의 인식에서 태동한 모든 정치/사회사상과 종교는 인간 집단이 지닌 인식을 분유(分有)하고 있다.

일면이라 하여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합당한 인식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뉜 것을 합치지 않으면 총체는 없다. 늘 그저 파편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세계관'을 지닌 이들, 특히 그 세계관을 확신하는 이들과는 대화하기 어렵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생각을 '한낱 생각', '한낱 믿음' 치부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것은 영원불변의 진리로 여기며,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를 적으로, 여지를 두는 이들은 회색분자로 간주하여 없애려 든다. 기득권, 반동분자, 반체제 세력, 빨갱이, 페미, 한남, 용공분자, 이교도, 신의 대적자, 남성/인종우월주의자, 차별주의자, ……


들이 만들어 낸 말은 구별의 말이다.

구별이 구별에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다.

구별은 차별로, 차별은 배제로, 배제는 축출로 이어지며, 축출은 끝내 멸절로 이어진다. 그것을 오스만 튀르크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독일의 유대인 학살, 소련의 대숙청,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중국의 문화대혁명,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의 테러 등의 사례로 목도했음에도 달라진 것이 없다. 사람은 사람을 좀처럼 내버려두지 않는다. 적당히 인정하고 적당히 포기하며 적당히 변화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원치 않는다.

합일? 대화? 일치?

나누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


모두가 칼과 총을 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적어도 말과 생각에 남을 쓰러뜨릴 맹독을 묻혀야만 '나'의 공간을 지켜낼 수 있다. 여기에 무슨 상생과 공존이 있나? 그저 폭력에 의한 정복욕과 권력욕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마저도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합법적으로 이뤄진다. 위기다.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이 침묵하면, 심지어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공격성을 띠게 된다면, 그 사회는 이미 극으로 치달은 후다.


이런 사회에 긍정적인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이게 인간의 본질이자 실체라면, 실로 절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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