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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29. 2023

감자전, 그리고 할머니의 전분(澱粉)

며칠 전, 일을 다녀오신 아빠가 말씀하셨다. "감자전 안 해 먹을래?"

"...별로 생각 없는데요."

하지만 아빠의 말투와 눈빛으로 보아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휴, 귀찮게 되었군.


동생이 말했다.

"그냥 감자 간 것만 부치면 되나? 부침가루 같은 거 넣어야 하지 않나?"

우리는 일단 녀석을 처리한 후 뒷일은 엄마에게 맡기기로 모의를 했다.


결국 아빠는 감자를 열 개는 넘게 갖고 오셨고, 나는 감자 껍질을 까고, 동생은 열심히 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돌아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감자전을 만드셨다. 엄마는 잡곡이 담긴 통 아래에 있던 '전분'이 든 통을 꺼내셨고, 그걸 몇 숟가락 퍼서 물 빼고 남은 감자 반죽에 넣으셨다. 그러고는 말씀하셨다.

"이거 너네 할머니가 만드신 거야."

동생이 말했다.

"그거 안 상해??"

엄마 왈, "안 상했어."


그렇게 내 살면서 알게 된 오래 둬도 안 상하는 물질 목록에 '전분'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에이 그래도 설마 정말 안 썩으려고?




동생이 왜 전분이 상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느냐,

그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2004년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 그 가루는 아무리 못 돼도 거의 20년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문제 없이 여태까지 보관돼 왔고, 또 사용돼 왔다는 사실은, 상했느냐는 질문을 이끌어내기에도, 신기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했다.


어쩌면, 그 가루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남은 할머니의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멀쩡해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대체 얼마나 많이 해 두셨으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대체 얼마나 잘 안 썼으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건지,

알쏭달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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