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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l 07. 2023

집단주의의 패악질 : 토사구팽

집단주의의 가장 중대한 해악은, 바로 개인을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부속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집단에 속한 구성원이 실수나 과오를 저질렀을 때, 집단의 이름으로 공동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집단의 안정성을 명목으로 그를 내치는 것이 바로 집단주의의 본모습이다.


이 무슨 패악질인가? 집단의 논리와 대의를 위해 개인을 동원하는 게 집단주의라면,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함께 책임지고 해결하는 게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하지만 현실적으로 집단주의는 절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다. 희생을 강요당하는 이는 늘 개인이다. 그 개인은 집단의 명에 따라 헌신해 왔음에도 정작 그 어떤 구제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진다. 문제를 일으킨 개인은, 설령 그것이 고의에 의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즉각 타자화되어 '우리'와는 무관한 존재로 전락하며, '우리'의 존속을 위해 자신이 몸담아 온 집단에서 추방당한다.


집단주의가 무슨 모두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사실상 개인의 존재를 집단의 그늘 아래에 두어 드러나게 하지 않겠다는 의도다. 그렇게 지워진 개인은 집단의 유지에 기여하는 도구적 존재로 규정되며, 그렇게 개별자의 존재성과 개성이 훼손됨으로써 집단은 그 존재의 근거를 확보한다. 즉 집단주의적 에너지는 그 자체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개인의 존재성을 빨아들여 형성된, 철저히 개체 의존적인 대상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 집단이 개인의 어려움은 외면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에너지원을 끊어내는 것이 오히려 집단의 유지에 효과적이란 판단에 의거한 아주 효율적이면서도 잔인한 행태다.


집단주의는 실로 사악한 가치 체계다. 집단 그것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끝내 마지막 남은 단 한 명의 피마 양분으로 빨아들 준비가 돼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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