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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l 22. 2023

인간 인식의 얄팍함


거의(란 부사를 쓰긴 했으나 아마도 전부 다 해당될 것이다.) 모든 버스의 단말기에서는 승객이 상차하여 요금을 지불할 때나 하차 태그를 찍을 때나 삑 또는 삐빅 소리가 난다. 이는 카드 정보에 따라 승객이 얼만큼의 요금을 내는지를 알려주는 표지에 해당한다.


내가 사는 지역의 버스도 마찬가지 언제나 단말기에서 소리가 난다. 다만 집에서 시내를 오가는 버스 중 한 대는 그렇지 않아서, 상차 시에는 확실히 소리가 나나, 하차 태그를 할 때엔 단말기에서 저 삑 내지 삐빅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저 "하차합니다."라는 기계음만 나올 뿐이다.


사실 "하차합니다."라는 안내음만 나와도 카드가 단말기에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거기에다 인식되었음을 알리는 파란색 등까지 켜지기 때문에 딱 보면 충분히 문제가 없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당연해 보이는' 예측과 달리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몇몇 사람들은 하차 단말기에 카드를 갖다댐으로써 태그가 되었음을 알리는 음성과 조명이 눈과 귀에 인식됨에도 불구하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차 카드를 갖다 댄다. 그러면 하차 단말기는 이미 처리된 작업을 불필요하게 다시 수행한다는 의미로 "이미 처리되었습니다."라는 안내음을 내보내는 한편, 이번엔 파란색이 아닌 붉은색 조명이 켜진다. 이에 대한 반응은 두세 가진데, 됐다 싶어 카드를 집어넣는 경우, 된 건가 싶어 또 한 차례 카드를 대는 경우, 아무래도 안 되는 것 같아 기사에게 묻는 경우 정도다. 반응은 각기 다르다지만 그 원인은 한 가지로, 결국 '삑/삐빅'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가 없음을 인지한 이는 그것으로 논외가 되었지만, 분명 처리되었다는 음성이 나왔고, 빨간색은 뭔가가 틀렸거나 잘못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임을 학습하였을 것임에도, 앞의 "하차합니다."와 함께 나온 파란 불빛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은 채 자신의 간과와 착각으로 인해 야기된 상황에 당황해한다.




사람은 한번 무언가를 학습하면 그것대로 행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실질적으로는 그다지 불필요한 사항이라 할지라도 '늘 그랬다'는 이유로 자신이 학습한 모든 절차대로 일이 진행돼야 상황을 최종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심지어 학습된 내용이 아예 틀린 것이라 할지라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군가가 힘겨운 산행 끝에 정상에 올랐다. 온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누가 봐도 정상이다. 그런데 그곳에 '정상'을 나타내는 표석이 없으면 그가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아마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그 사람은 확실하게 정상에 오른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정(假定)적 상황과는 달리 실제 상황에서 사람의 인식 체계는 그렇게 철저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판단하기에 확증이 없는 것 같다면 아무리 문제가 없더라도 문제라고 인식한다. 이는 인간 인식이 늘 학습과 경험이라는 요소에 상당 부분 좌우되며, 때로는 맞는 대상/상황조차 그렇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게 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그 인식이 틀렸음을 확인하기까지 계속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며, 무엇이 올바른지를 인식했다 하더라도 그 행동을 바로 끊어내지는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잘못되었거나 불필요한 요소에 상당 기간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단말기에서 내는 음성도 마찬가지다. 파란 불빛 하나만 들어와도, "하차합니다." 소리만 나와도 상황은 끝난 것이다. 하지만 버스를 탈 때마다 늘 세 가지 요소가 동시적으로 나타났다는 점과, 그 중에서도 이 '삑(삐빅) 소리'가 핵심적이라는 자체 결론이 몇몇 사람들로 하여금 절차가 온전히 진행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과업을 끝까지 수행했음에도 '끝'이나 '완료'와 같은 문구(표지)가 보이지 않으면 이를 의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인간의 인식이 실제 상황보다 자신이 그 상황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를 우선시함을 의미하므로, 한번 학습된 무언가는 그것이 핵심적이거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님에도 계속해서 그 존재감을 표출해야만 안도감이나 성취감을 제공해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인간의 인식 체계에는 이렇듯 꽤나 얄팍한 구석이 있다. 이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아주 사소하고 흔한 상황에서 또한 자주 보이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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