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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l 24. 2023

어느 해, 스승의 날에 썼던 글.

제목 : 스승의 날

*최근 발생한 사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다만 생각할 거리를 제시하고자 옛글을 끌어올린 것입니다.



스승의 날,
스승에게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제정한 기념일이다.

내가 어릴 때인 200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학생들은 스승의 날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카네이션을 사다가 교탁 앞에 놔두곤 했다. 대개 부모님들이 준비해서 건네라고 말씀하시는 식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갖고 있는 교사에의 이미지는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분명 열심히 사시는 선생님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훈육받기에 합당한 이유라 할지라도 체벌을 지나치게 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같잖은 이유로 학생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었기에 교사의 존재성에 관해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한 적도 있고, 학생이 자습서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이를 막 가져다가 찢고 막 구겨서 내팽개치는 이도 보았기에 조금 더 공부하겠다는데 격려는 못 할 망정 저렇게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특히 수업 시간에 제대로 된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교사들은 지금 와서는 정말…그 역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데, 대개 그런 경우는 공부를 제대로 안 했거나 본인 과목이 아닌 다른 분과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였다.
어쨌거나 2010년 초중반의 교실이든 2010년 후반의 교실이든 학생들이 수업을 듣긴 커녕 자고 떠들고, 심지어 A 과목 시간에 수업 안 듣고 A과목 문제집을 펴다가 해제(문제풀이)한다거나 아예 다른 과목을 공부한다든지 하는 건 똑같을 것이다. 당연히 교사들의 고충은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다. 학생(혹은 일부 부모)들은 '교사가 제대로 가르치면 우리(아이)가 딴짓을 하겠느냐'며 항변할진 몰라도, 10대 때 그래도 공부를 했던 입장으로서 보면, 글쎄? 그다지 동의가 되진 않는다. 그냥 본인들이 공부에 흥미가 없으니 안 한 걸 가지고 교사 핑계 대는 게 다반사랄까. 분명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있었고, 그 노고와 학생들을 향한 안타까움, 교육계의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이해했기에 때론 졸기도 했고 집중을 잘 못 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수업을 들었다.

나의 교사에 대한 생각은 이제 뒤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번 스승의 날을 기해서, 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교사의 모습에 대해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교사란 단어에 스승의 의미를 지닌 '사(師)'라는 한자가 있다고 해서 과연 교사가 스승이라 불릴 만한 존재인지란 문제다.
무엇보다 근대교육은 기능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지 인격 함양을 돕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다. 옛날에 사부(師父)라 불리던 이들은 학생들에게 사실이 아닌(혹은 사실보다) 이치를 논한 이들이었기에 분명 당시의 가르치는 이와 지금의 가르치는 이는 다르다. 더욱이 연예인들이나 사회적 저명 인사들이 매체에 출연하여 옛 선생님을 찾았을 때 많은 이들이 댓글로 자신을 담당했던 교사에 대한 폭언과 저주에 가까운 발언을 하는 걸 들여다보면, 교사 OOO은(는) 교사도 아니었다며 그저 학생을 개 패듯 패고 함부로 대한 존재라는 내용이 꽤 있다. 이런 걸 보면 과연 그 당시의 '교권'이란 것이 개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권위였는지,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부여된 개념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확실한 건 교사의 권위엔 반드시 매(폭력)가 수반되었단 사실이다. 더욱이 돈이 없다는 이유로 학생을 무시하고 차별했으며 유력한 집안의 학생에게는 잘해주었단 것을 보면 이게 진정 교육자의 모습인지 아님 모리배의 모습인지 의심케 된다.

교육계에 불어온 자유화의 바람이 교권을 무너뜨렸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나도 어느 부분에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자유가 권위를 붕괴시키는 건 당연하다. 그 권위는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교사의 권위만을 세울 것인가? 이 시대에 이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십 년에 걸쳐 굳건히 유지되어왔던 교권의 추락은 결국 누가 야기한 셈인가? 내가 보기엔, 자유의 물결이 밀어닥치며 교사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한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너무 빠르게 개혁이란 이름으로 시스템을 바꾼 정부의 실수와 잘못, 독선도 한몫하지만 궁극적으론 너무나 당연하게 누려왔던 기존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교사들에게 그 잘못이 있는 것도 같다. 이래서 자유란 언제든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함에도, 권위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함에도 두 측면을 다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 지금 공교육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주요 원인 중 하나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각 분야엔 서양적 도구 위에 동양적 가치가 깃들어 있다. 교육도 그 중 하나다. 한 사람을 만드는 것보다도 한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서양교육의 특성(이건 그저 동서양의 교육관을 단순히 유형화했을 뿐, 서양 교육이 저런 성격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으며, 동양의 그러한 교육 이념이 본질적으로 실현되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을 동양인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하긴 어렵다. 시대적 특성상 근대近代를 자의로 맞이하지 않았던 우리의 선조들과 이웃 나라 조상들은 근대 서양 교육을 곧 열강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주와 독립의 수단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 보니 체질에 맞든 맞지 않은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와중 나라는 남의 손에 넘어갔고, 우리의 교육은 우리의 바람(wish)이 아닌 남의 의도대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수에의 (부정적)관념은 교사보다 더하다 해도 무방하다. 그 옛날 어려운 시절에 국내든 국외든 유학을 해서 학위를 취득한 이에게는 분명 사회적 존경이 따랐다. 배운 자에겐 학문의 깊이뿐만 아니라 사고의 지평까지 뒤따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를 살아가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의식과 관념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위에 언급했듯, 어느 정도 근대 교육이 국내에서 체계를 잡아가면서, 교수자에게 그런 도덕적 당위성을 계속해서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교수란 존재는 점점 세상을 바꾸는 데에 학문을 쓰기보다 학문 자체를 탐구하는 이로 자리잡아갔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 교수인데, 우리 사회는 그런 교수에게 애꿎은 걸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 교수는 학생에게 '공부는 엄청 해서 해박하지만 존경받을 사람인지는, 글쎄…….'란 인식을 피하지 못하게 됐다. 한편으론 웃기고, 한편으론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분명 자신의 직업에 보람과 사명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해나가는 교사와 교수, 즉 '참 스승'이 있다는 것이다. 그저 특정 과목이나 학문 분야에 천착(무언가에 깊이 파고듦, 혹은 어떤 것을 진지하게 탐구함)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이를 통해 학생들에게 어떠한 가치를 제시하고자 하는, '너희가 배우는 것이 결코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해주고자 하는 이들이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면만 보고 판단한다. 대중은 안 좋은 걸 더 쉽게 인지한다. 그래서 더욱 주의해야 한다. 여기에서 책임의식이 발휘되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내 동료를 위해서라도 내가 가진 '교사' 혹은 '교수'란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며, 과연 교사다움과 교수다움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기에야말로 공자의 정명正名사상이 적용되어야 한다. 나의 명분名을 올바르게正 함으로써 합당한 바(본분)를 행하는 것이 정명 아니던가. 다만 이를 위해선 모두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학생은 학생다움이 무엇인지, 부모는 부모다움이 무엇인지(학생의 부모인 '학부모'가 아니라 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부모'의 참모습 말이다)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교사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방법으로 아첨하는 이가 있는 반면, 어디 남의 집 아이에게 함부로 하느냐며 본인이 더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이가 있으며 교사는 학교만 잘 보내면 된다고 막말하는 사람이 있는 동시에 교사는 학생의 인격을 담당해야 마땅하다고도 하는 사람이 있다. 뭐 어쩌란 건가? 차라리 하나만 기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부모가 이런 다중적인 모습을 보이면 학생은 무의식중에 이런 면을 따라 배운다. 그래서 교사를 때리거나 모욕하는 학생이 나오는 것이다.

말은 쉽다. 지키긴 어렵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쓴 대로 살 생각이다. 이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할 것이다. 교과서는 정석을 가르치지만 세상은 편법과 지름길을 선호하기에, 나 또한 이러한 유혹에 시달릴 것이며 때로는 정석에 대한 의심과 불신으로 고뇌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바른 길을 가려는 건, 이것이 불변의 가치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 그 믿음의 원천은 불완전한 나에게서 비롯되는 오만이 아닌 참다운 진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 진리를 고수하며, 믿음을 간직하는 삶이 내 평생에 걸쳐 유지되기를,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역지사지'란 말이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恩高如天
(은고여천)
: 은혜가 하늘과 같다.

이 말이 강요가 아닌 자발로서 유효하기를,
이 세상의 모든 교사, 부모, 학생이 서로 존중하는 세상이 오기를.



<+>글을 올리며.

한국 사회는 압도적 위력이나 폭압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기본적인 도리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그 어떤 것도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최종수정 : 2023.07.2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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