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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l 31. 2023

온라인에서 함부로 댓글을 달면 안 되겠다.

모르는 누군가와 통한다는 것,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대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와 상대방이 '서로에게' 말이 통하는 존재임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는 왜 그런 편협한 정의를 내리느냐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마주하여(對) 말하려면(話) 서로가 특정 분야나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나 견해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교차할 때 이를 이해하거나 이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그건 그냥 인간이란 이름의 벽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가 제(3인칭 대명사) 블로그에 쓴 글을 보았다. 뭔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댓글을 달고 그가 쓴 글과 관련된 책을 알려주며 읽어보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그가 구구절절 남긴 글은, 해당 책의 저자에 대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정작 본인 글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말을 하는 이었음에도 '최악'이라 묘사하는 걸 보고 아차 싶었다. 애초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그가 열거한 내용을 보니 어떻게 반박을 해도 도무지 먹힐 것 같지 않아 단념하고 더는 그 페이지에 접속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사람들이 왜 자꾸만 어딘가에 스스로를 가두는지, 본인이 골몰하는 것 이외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는지를 알 것 같다. 일단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입장이나 견해가 옳다는 주의를 견지하는 편향적 존재다. 이로 인해 동시에 편협하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나의 인식 체계를 벗어나는 주장은 고깝게 받아들이긴 하나,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한 가지 의견만이 존재할 수는 없다는 입장으로서 최대한 나와 다른 의견을 접하려고는 노력한다. 그러한 시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어느 편에도 속하고 싶지 않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바로 나다. 아마 이런 내가 일제 강점기를 끈질기게 버텨 해방이 되기까지 살아남았다 해도, 끝내 누군가에게 총이나 칼을 맞아 죽었으리라 생각한다. 감히 위대하고 훌륭한 독립운동가들과 나를 같은 위치에 둘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생각으로 미뤄 보건대, 식민지 조선의 백성으로 살았다면,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았더라도 분명 개죽음을 당했을 것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뿐이다.


사람이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상당히 많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마주쳤을 때일 것이다. 뭐 굳이 거창한 신념이나 사상, 이념이 아닐지라도 취미나 기호 하나만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사람을 만나면 각종 미사여구를 들먹이며 기뻐하는 것이 다 그런 이치 아니겠는가? 고대 중국의 '백아'가 '종자기'를 만나 '너는 나의 지음'이라 했던 게 괜히 그랬던 게 아니라는 말이다. 백아에게 있어 종자기도 지음이었지만 종자기에게 있어 백아도 자신의 음악적 취향과 수준에 딱 맞는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는 훌륭한 친우였을 터. 그러나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더는 내 음악을 알아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은거했다고 하니, 사람이 자기와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귀한 일인지를 알 수 있는 고사다.


그렇다고 내가 위에 언급한 그 사람의 글을 읽어서 희열과 환희에 벅차올랐던 건 전혀 아니다. 지금의 나는 냉소와 염세의 극치를 달리고 있기에 웬만해서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쓴 글의 논조는 나의 생각과 어느 정도 비슷했고, 그래서 그에게 '이런 책이 있으니 한번 읽어 보라' 글을 써 보냈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대차게 비난하는 글을 쓰다니, 이런 낭패가 있나.


한때 <'커뮤니티'가 생기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쓰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지금도 내 '작가의 서랍'란에 고이 잠들어 있는 이 글의 부제는 '생각이 통하지 않는 이와, 인간은 절대 소통하지 않는다.'다. 이 글의 주제가 바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주제와 딱 맞아떨어진다. 인간은 절대 생각이 통하지 않는 이와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예전 글에 썼듯 자신의 핵심적인 가치와 정반대되는 얘기를 하는 사람, 또는 자신이 전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집단이 어쩌다가 스스로와 매우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을 때 느끼는 당황스러움이나 당혹스러움은 실로 당황스럽다. 왜냐, 그런 것을 갖다가 '소통이 된다' 하기에는 기본적으로 서로의 입장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저 글에서 지적했던 것은 그렇게 서로 평소에 죽일 듯 달려들던 이들이 '공동의 목표'가 일치한다는 점 하나로 갑자기 연합하여 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진정 저들이 어떤 '신념'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갖고 있는 이들인지 매우 의심이 들게 해서다. 이런 부분에서 합의와 타협이란 참으로 어렵고 한편으론 공허한 가치가 된다.


좌우간, 나는 그 사람과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저 나의 견해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 사람은 이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이 상황을 두고 나는 타인과 대화를 주고받고 소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고, 더군다나 이 '온라인' 공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비/반언어적 표현 없이 순전히 글로만 각자의 생각이 전해지는 상황에선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 감정을 고려할 이유가 없어지므로 더욱 원색적이고 직설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때론 의도적으로 공격적인 어기를 섞는다. 이러면 글로 말을 건넨 사람 입장에선 뭐라 받아쳐야 하나 싶어진다. 이에 대한 반응은 결국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1) 똑같이 들이받아 싸우거나, 2) 조용히 차단하거나.


내가 택한 대응 방식은 유감스럽게도, 그러나 현실적이게도 두 번째였다.




솔직히 대화와 타협, 소통과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정작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꽤나 자주 한다. 일단 관점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면 부딪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것이 설령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 이면에 담긴 가치는 반드시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표면적인 것만 보고 누군가에게 접근하지만, 언젠가 그 이면이 어떠한지를 알게 되면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든지, 거부하고 포기하든지 하게 된다. 물론 때로는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압도하기도 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을 했지만서도, 나는 통(通)과 불통이란 50:50 확률을 감수하고서도 그 사람에게 긍정적인 패를 던진 것인데, 막상 부정적인 패가 돌아오니 이렇게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무슨 반응을 기대한 것인가....'


탈종교한 나는 가족이 그런 얘기만 해도 짜증이 치솟는다. 그냥 그런 종교적인 얘기 자체에 거부감이 심하다. 그것은 '어조가 단정적이기 때문'이다. 한때 내가 그랬다. 세상을 특정 종교의 세계관에 의거하여 일도양단했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인정하는 척 사실은 배척했다. 모든 것에 가치가 있다고 말했지만 실은 '내 종교'의 가르침에 의거해야만 비로소 온전한 가치를 갖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눈에 올려져 있던 안경을 벗겨내니 세상이 다르게 보임을 깨닫고 더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사람은 자신의 눈에 렌즈가 씌어 있음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자기 성찰'이 부족한 탓이다. 뭐, 이게 나의 어마어마한 수행 덕분인 건 아니나 어떤 계기로 내가 아주 두꺼운 렌즈로 세상을 보았음을 깨닫고 나니 세상을 최대한 왜곡 없이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야말로 언제나 자기 편향적인 인간에게 있어 필수적으로 함양해야 하는 태도인지를 깨달았다.


그런 내가 이런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표면만 보고 나의 관점을 누군가에게 제시했다는 것이 왜 이렇게 찝찝한지 모르겠다. 상황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그런 것 같지만, 그보다도 말이 통할 것 같았던 누군가가 날선 반응을 보이며 내 말을 그대로 튕겨냈다는 것이 불쾌해서 그런 점이 더 클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는 더는 그에게 반응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니 상황은 종료됐다. 문제는 꼭 이런 게 불쑥불쑥 튀어올라와 나를 성가시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런 것이 하나의 실패의 경험처럼 와닿기 때문인 것일까?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니,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그가 비록 나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것처럼 보였음에도, 나와 그가 '그 사안'에 있어서는 매우 두꺼운 렌즈를 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사안에 대해 관점을 바꾸었다고 해서 렌즈를 완전히 벗겨냈다고 할 수는 없다. 맨눈으로만 세상과 각종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으니까. 나는 이 점을 다소 간과했다. 정당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같은 또는 비슷한 정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 정당이다. 그런데 그런 정당에 여러 갈래의 계파가 존재한다. 왜 그런 걸까? 그들의 의견이 다 달라서? 그런데 어떻게 같은 당에 있을 수 있지?

이는 그들이 같은 렌즈를 끼고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각기 다른 두께와 굴절율을 지닌 렌즈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동소이'란 표현을 흔히 쓰곤 하지만, 오히려 이 '소이'의 부분이 큰 차이나 갈등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많은 이들이 쉽게 넘긴다. 사람은 온전히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다. 이를 간과하기에 누군가가 나와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이를 상기하고 명심할수록 사람의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람의 관계는 반드시 서로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나와 다를 것 같다는 이유로, 갈라질 것 같다는 생각으로 접근을 끊게 되면 당연히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거둬진 순수한/긍정적인 호기심은 언젠가 '적대적 낯섦'으로 바뀌어 타인의 접근 자체를 차단하는 방어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사람이 서로를 경계하고 배척하는 것은 다 이런 호기심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에게서 좋은 점만 보려고 하면 볼 수야 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빨리 바닥난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면, 나쁜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 그 관계는 끝이다. 더군다나 일회성과 휘발성을 전제로 하는 이 인터넷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관계랄 게 없는 상황에서 말 한 마디 던졌다고 뭔가 유의미한 것이 오고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천진난만하고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고, 그 결과는 'X'였다.


아무래도 인터넷 공간에서, 특히 타인의 공간에다 나의 생각을 표출하는 것을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네이버 블로그나 브런치에 댓글을 잘 다는 편은 아니지만, 괜히 이 '불필요한 호기심'을 발동했다가 뭔 반응이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니...그냥 조용히 내 글이나 쓰는 쪽이 여러모로 낫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누군가를 오해하듯, 누군가도 나를 오해할 테니.




일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일로 이렇게 구구절절 긴 글을 쓴 것으로 보니, 태연자약한 군자가 되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싶다.


아무쪼록 모르는 이에게 뭔가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말도록 해야겠다. 그러려면 아예 떡밥을 던지지 말아야겠지.

결국 이 파편화된 시대의 조류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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