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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Aug 01. 2023

그래, 교사만 힘든 거 아니다. '그런데,'

앞 문장은 위장용(僞裝用)일 뿐. 핵심은 '그런데' 이후에 있다.

*글에 자살이란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극단적 선택'과 같이 에둘러 표현하는 말을 쓰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생각해 사용하지 않으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이 세상에 본인이 힘들지 않다 얘기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서식지 절멸' 수준으로 없을 것이다.

서식지 절멸이 무슨 뜻이냐면, 생물계의 한 개체가 자연 상태에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를 일러 '사실상 멸종'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자기가 편하게 살아감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란 말이다.


그래, 따지고 보면 교사만 힘든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다. 교사보다 힘든 사람 훨씬 많다. 설령 객관적으로 교사보다 덜 힘든 직종이라 해도 더 힘들다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는 개개인의 감각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비교해 봤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무리 모두가 힘들다 말하더라도 정작 이를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살자다.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도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 도무지 버틸 수 없어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옛날엔 그런 이들을 두고 나약하다, 정신력이 부족하다 힐난했을지 모른다(지금도 그런 사람들 있다.).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부담감을 느끼면 스스로 삶을 포기할지를 생각해 보라.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기 전,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몇몇 사람들을 '애국지사'로 부르는 이유가 뭘지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삶을 하찮고 가벼운 것으로 여겨 죽었다고 생각했다면 절대 '지사'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너무 분해서도 죽고, 너무 괴로워서도 죽는다. 그리고 그 분함과 괴로움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그 무엇보다 인간이 집착하는 '삶'을 포기하게 한다. 그런 존재가 사람이다.




지난 6년간 교사 1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6년간 100명, 평균으로 따지면 한 해에 16명 정도가 죽은 셈이다. 이렇게 보면 누군가는 '얼마 안 죽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교사'가 굳이 죽음을 택했을지, 또는 죽음이란 상태로 몰렸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책임지는 일을 하는 이들이 자살한다는 것은 필히 그 이유를 따져 보아야 할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교사에게 기대하는 바, 그리고 교사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바가 있음을 고려할 때, 그들의 죽음은 분명 석연치 않다.


평균의 함정에 빠지면 사건의 본질로 파고들 수 없다. 매년 1만 명 넘는 사람이 자살하지만, 최소치를 1만으로 잡더라도 이를 전체 인구(5100만)의 비율로 계산하면 약 0.0002%에 불과하다. 이렇게만 보면 '고작' 100명 중 0.0002명이 죽은 것으로, 죽었다 할 수도 없는 수치다. 그러나 그것이 구조적 문제로 고착화되었다면 다른 얘기가 된다.

교사의 죽음도 이와 같다. 이런 측면에서는 교사의 자살 수보다도 정년 이전에 교사를 그만두는 이들의 비율 증가폭을 계산하면 업계의 현실이 더 자세히 드러난다. 안 그래도 지난 7월 25일에 게재된 한 신문사의 보도 제목이 '2022년 명예퇴직 교사, 최근 6년 중 최대... 전체 퇴직자의 43%는 초등교사'다. 누군가는 2022년이면 한창 코로나 유행 시기라 애들 학교도 안 나갔을 텐데 왜 그만두는 사람이 많았냐고 딴지를 걸지도 모르겠는데, 이는 학교 현장이 교사들이 느끼기에 날로 나빠지고 있다는 것의 방증인 셈이다.




모든 삶을 동등하게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당연히 죽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죽음에는 크게 슬퍼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누군가의 죽음은 모른 척하고 이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그렇게 보면 몇몇 교사들의 자살은 그다지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말을 바꿔 보면 다르다. 만약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서의 중압감과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집단적으로 자살한다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비율이 꾸준히 는다고 가정해 보라.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교사의 죽음이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자녀가 태어나서 자라 독립할 때까지 부모와 함께하듯 거의 모든 학생은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늘 교사라는 존재와 함께한다. 그런 이들이 버티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군사부일체'니 어쩌니 하는 것을 떠나서, 실로 심각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연이은 교사의 죽음을 부각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이를 다른 이들의 죽음보다 무겁게 묘사했을 가능성을 인정한다. 다만 이 사회에서 교사에게 부여되어 왔던 직업적 가치와 사명이 여타 직업보다 다소 중했던 것이 사실이면서도, 정작 그런 이들을 '내 아이'를 위한 도구적 존재로 여겨 왔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죽음을 인해서야 드러났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6년간 100명의 교사가 자살'했다는 이 사실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교사란 직업의 의미와 실제로 그들을 대하는 '학'부모들의 태도가 일치했다면, 이런 안타까운 일은, 설령 일어났다 해도 집계된 것보다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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