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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Oct 02. 2023

최소한의 헤아림

약자의 삶, 약자를 돌보는 이의 삶

약자의 삶은 반드시 경제적 곤궁함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페미니즘 담론의 전개 과정에서 '상호교차성' 개념이 제기됐듯, 누군가가 약자나 소수자가 됨에 있어서 어떤 '전형성'이나 일률적 특성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여러 상황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돈이 많아도, 사회의 주류라 여겨진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약자나 소수자의 특성이 있을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들)를 일러 다수자라 규정하고 쉽게 낙인을 찍는 것은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매우 단순하고 저차원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다만, 보편적으로 약자에게는 사회적 자원에의 접근성이 떨어지기에 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흔한 일임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경제적 궁핍보다도 어려운 점은 '사람들의 시선'일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아닌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 약자이고, 본인은 그를 돌봐야 하는 입장에 있다면 더더욱.


건강에 문제가 있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으나 적어도 그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장애는 아니라(개인적으로는 이 질환이 내게는 장애다.) 일반적 의미의 약자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불편함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으로서, 약자에 해당되는 이들, 특히 그들을 돌보는 이들이 얼마나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 헤아리게 된다.




카페에 어떤 노부부와 그들의 아들로 보이는 남성이 들어왔다(나중에서야 그 남성은 두 사람의 손자임을 알게 됐다. '할머니'란 말이 들려서 말이다.). 노부부는 전형적인 노년 여성과 남성이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았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행동, 불안정한 시선 처리, 해맑은 웃음에 서린 위화감, 결정적으로 잊을 만하면 내지르는 괴성까지. 진동벨이 울리자 그것을 따라 "으에~~~!" 하며 큰 소리를 내고, 가게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신기한 듯 쳐다보는 그.

정작 그 노부부는 그를 전혀 제지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약자라 해서 선하지는 않다. 흔히 '언더 도그마'라 일컬어지는,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강자에 대한 약자의 도덕적 우월감은 어쩌면 실재하는 가치일 수도, 그저 누군가가 만들어 낸 허상일 수도 있다. 때로는 약자라 불리는 이들이 몇몇 파렴치한 다수자나 강자보다 우악스럽고 불쾌한 행태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기에, 약자라 해서 특별히 선한 성품을 지닌 것도, 약자가 아니라 해서 배 째라 식으로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가 어떤 사람이냐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여러 상황이나 요소는 차치하고서, '그 상황', 즉 약자가 일반적인 사람들과 대면하게 되는 상황만 따지고 보면, 그들도 괴롭고 힘들겠지만(물론 정신장애로 판단과 인지력이 매우 떨어지는 경우는 모르겠다.),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돌보는 이(대개 그들의 부모)야말로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가족이 장애인이란 사실로 인해 감내해야 했던 다른 이들의 따가운 시선과 날선 말 탓에 방어적이면서도 동시에 공격적인 성향을 띠게 됐을 수도, 모든 상황에서 고강도의 통제를 가하기보단 약간의 방임을 택했을 수도 있지만, 상황이 어떠하건, 어떤 선택을 했건, 그들이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까 그 남성이 이상한 소리를 냈던 것처럼, 의도치 않은 특성과 돌발행동을 타인이 '피해'로 인식하는 상황만큼이나 괴로운 것도 없을 테니까.


'정상성'이란 가치에 너무나 익숙한 한국인에겐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정상성이란,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해 언제고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불쾌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린다 할지라도, '그런가 보다' 내지 '그럴 수 있다' 하고 넘기는 유연한 태도를 갖출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동안 그 남성은 또 "으어~~!" 하고 몇 번 시끄럽게 소리를 냈지만, 나는 이를 이해하기로 했다. 구석에 앉아 침묵을 이어오고 있는 내게, 그의 괴성은, 어떻게 보면 카페에 머무르는 다른 이들이 크게 웃고 떠드는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그렇다고 적응이 된다는 얘긴 아니다. 그 남성의 외침이 마치 우리 집 옆에 있는 남의 집 외양간 소 울음소리를 떠올리게 해서 말이다. ^^;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최종수정 : 2023.10.0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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