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한 달도 지난 일이다. 올해 9월 8일,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인 길희성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오늘에서야 접했다. 이에 대해 감회가 생겨 글을 쓴다.
어떤 이가 그랬다. 종교학을 공부한 이들은 둘 중 한 부류에 속하게 된다고. 한 부류는 '종교는 다 똑같다'는 쪽, 다른 한 부류는 '종교는 없다'는 쪽. 전자는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이고, 후자는 종교 부정의 입장이다. 종교학을 공부하면 특정 종교의 우월성을 부정하거나, 아예 종교 자체를 인간이 만들어 낸 가공의 것으로 간주하여 부정한다는 말이다.
길희성 교수, 그는 본인의 종교적 배경과 학문적 탐구를 통해 첫 번째 부류를 택했다고 해야겠다.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적 배경을 갖고 있지만 그는 종교학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모든 종교는 서로 통하며, 그러므로 한 곳으로 귀결된다는 사상을 표방하였다. 사실 종교의 입장에서 저런 사상은 이단에 해당한다. 모든 종교의 교리를 망라했다 주장하는 신흥 종교라도 저런 주장은 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왜냐, 종교라면 필시 어떤 이상적 상태나 내세에 이르는 '유일한 진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이슬람교도든, 힌두교도든 간에 세상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유일한 진리는 자신들의 종교에 있으며, 자신들의 종교야말로 진리 그 자체라고 선언(단언)한다. 만약 어떤 종교에서, 또는 어떤 종교에 귀의한 이가 독단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 종교는 종교라고 하기가 어려우며, 저리 말하는 소위 '종교인'은 그 종교에 몸담고 있다 할 순 없다. 사랑과 평화가 모든 종교의 공통, 그리고 핵심 가치라 한들 (불교나 힌두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슬람교인이 천국에 갈 수는 없다. 심지어 내세의 존재에 유보적인 입장을 지닌 유교라 할지라도 공맹(孔孟)과 그 후예의 가르침이 아니면 대동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종교의 독단적 면모를 맹렬히 비난하지만, 사실 종교에 있어 포용과 배타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배타성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나는 길희성 교수에게 그 어떤 것도 빚지지 않았다. 그에게 수업을 들은 적도, 그의 저서를 읽은 적도 없다(정확히는 사놓고 읽지 않았다. 그마저도 단 한 권.). 하지만 한때 종교를 갖고 있었던 이로서, 그리고 이제는 종교를 세속의 눈으로 바라보는 입장으로서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이유는, (목사, 신부, 승려 등을 일컫는) 종교인이 아닌 학자의 입장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그의 통섭적인 관점과 종교성 자체에의 탐구는 믿음이 그 가치를 상실한 시대에 믿음을 진지하게 대하는 이들에게 단 한 가지라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유용성의 관점이 아니라, 영성이란 것이 사실상 소멸해버린 이 합리주의 시대, 지성과 영성의 불가분성을 언급하는 것이 얼마나쉽지 않은지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시대에, 그의 담론은 단연 독보적이면서, 그렇기에 허를 찔러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 또한 영성, 영적 세계 따위와 같은 이성적 요소가 아닌 가치에 회의적이지만, 인간에게 정신이란 것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는 이라면, 인간 존재를 가시(可視)세계 또는 물질세계에 국한하려는 시도가 인간을 비인간화할 수 있으며, 인간을 바라보는 주요한 관점(또는 시선) 하나를 지워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 옛날, 인간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으로는 오로지 하나만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세상은 더는 유일한 렌즈만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쉽게 말해 그것에 질릴 대로 질렸기 때문이다. 진리란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쟁투에 지친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자신들에게 오랜 시간 강요되어 온 종교라는 렌즈를 벗어던졌다.
인간은 종교를 철저히 부정하며 동시에 합리성이라는 렌즈에만 철저히 의존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산산조각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바로 대규모 전쟁. 그렇게나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가 서로를 상대로 살육전을 벌인 것이다. 이는 세계 제 1-2차 대전이란 현실로 구체화되었으며, 인간은 더는 합리라는 렌즈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 존재의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철저히 무너졌기 때문이다.
인간을 마치 완전무결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했던 근대적 사고가 한계에 직면했으나, 인간은 다시 이전으로 회귀할 마음이 없었다. 다시 독단의 시대로 돌아가기엔 너무나 크게 변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인류 사회는 절대적 옳음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합의'에 의한 임시적 조치에 의존하기로 한다.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옳음'에 대한 관념과, 아직까지 유지되어 온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되, 특정한 가치가 모두에게 강요되지 않는 사회를 지향함으로써 최대한 갈등을 줄이겠다는 발상. 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현대 사회의 기본 전제이자 원리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이 최소화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옳음에 대한 인간 고유의 추구와 고집은, 더는 종교가 세계 차원의 갈등 요소로 비화되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던 이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더욱 강화되어 왔다. 옳음에 대한 가치 판단의 유보가 되레 각자만의 옳음을 주장하는 이들을 자극한 것이다. 자신의 신앙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이거나 죽음을 택하는 이들은 세계 각국의 중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여전히 종교의 이름으로 세속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에 종교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평화와 번영을 강조하면서,종교가 이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비판해 왔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갈등과 다툼에도 가치관과 견해의 차이가 깃들어 있지 않나? 가치관과 견해는 왜 충돌하는가? 이는 개개인의 관념이 상이한 믿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치인이 사회를 어지럽히며 또 망가뜨리고 있다 비난하지만, 정작 정치 없는 세상은 관점이 없는 사회, 달리 말하면 관점이 말살된 사회임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외면 또는 부정한다. 관점이 사라진 사회가 과연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역사가 보여주었듯 공백은 새로운 지배를 초래한다. 야망을 지닌 누군가가 그 틈을 타 자신의 가치를 강제하는 독재사회가 도래할지 누가 알겠는가?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도 나타나듯, 신념을 잃은 인간은 반드시 방황하게 되며, 그중 누군가는 회귀하기를 택한다. 그만큼 믿음이란 인간에게 있어 근본적이며 핵심적이다.
현대 사회에는 믿음의 중요성이 간과될 대로 간과되었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축이 믿음임을 너무나 많은 이들이 외면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사회가 지속되도록 하는 것은 이에 대한 믿음 덕분이며, 각자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세계의 모습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은 또한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믿음 때문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종교가 세상에 끼치는 해악을 운운하며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 제시하는 인간상, 종교에서 제시하는 이상향, 종교에서 말하는 도덕과 윤리가, 현대인에게는 그 어떤 쓸모도 없다며 내다버릴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믿음이 강하게 부딪치는 현 시대에,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제공해줄 수 있는지 따져 보아야 한다. 미래에 대한 믿음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한낱 동물에 불과하며, 어떤 측면에서는 좀비와도 같다. 아니, 좀비보다 못할 수도 있다. 흔히 좀비는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좀비가 아닌 다른 생명체를 살육하고자 하는 목표만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는데, 좀비에게도 '살해'라는 목표가 있거늘, 인간에게 믿음이 없다면 대체 삶의 근거가 무엇일까? 이는 종교적 차원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자체가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원천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그리고 종교학은 그런 측면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물론 종교는 사유보다 믿음을 앞세울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분기(分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철학마저도 인간과 사회,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일정한 관점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체계로서, 그 체계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최소한의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믿음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물론 현대철학에서는 이를 부정하지만, 이를 논박하는 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이므로 배제하겠다.). 니체가 노예의 도덕과 주인의 도덕을 구분한 것도, 이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듯, 모든 인간은 결코 믿음이라는 요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종교가 끝내 믿을 것만을 요구한다면, 종교학은 그런 종교 자체를 객관화하여 탐구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믿음 자체를 관조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한다.
길희성 교수는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종교학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그런 그가 (만)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니 아쉬운 마음이다. 확인해 보니 올해 초까지만 해도 세 권의 책을 출간했던 그였는데, 모 매체에 기고된 글에 따르면 근래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것으로 보인다. 그 어떤 종교보다도 유일무이한 절대 진리를 내세우는 기독교 신자로서, 이단적 주장에 해당하는 종교 다원주의적 입장을 가지기까지 결코 쉬운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겠으나, 그것은 종교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니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니고, 다만 그의 치열한 사유의 여정이 종교 신앙을 지닌 이, 또는 종교에 속하지 않은 이라 할지라도 귀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믿음 체계에는 고유의 배타성이 있기에 비로소 하나의 체계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만, 이에 침식되어 사유를 포기하고 오로지 믿음의 늪에 스스로를 빠뜨리기보다는, 자신만의 진리를 굳건히 견지하더라도, 인간과 사회, 세상에 대한 고민을 붙드는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 그 고민은 자신의 신념 체계란 틀을 넘어설 수 있어야 빛을 발한다. 이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진보주의자에게도, 보수주의자에게도, 막스주의자(Marxist)에게도, 자본주의자에게도, 합리주의자, 과학주의자, 그리고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믿음을 지닌 이에게도 반드시 해당하는 점이다. 믿음에 대한 점검과 객관화는, 인간이라면 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중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때가 늦긴 하지만, 길희성 교수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생전에 그가 도달하고자 한 어떤 곳이 있었다면 꼭 이르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