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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Mar 12. 2023

신흥 사이비 종교, 그리고 '믿음'

우리는 얼마나 믿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나는 신이다>가 꽤나 많은 각광을 받았다. 아무래도 3월 초에 공개되었다 보니 막 중순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는 약간 수그러든 분위기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21세기 한국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며 경악했고, 관련 보도도 계속해서 이어지고다.


아쉬웠던 것은 사람들이 자꾸 'JMS'라는 종교에만 초점을 맞추었단 점이다. 특언론에서 그랬다. 분명 <나는 신이다>에서 다뤄진 종교 집단은 <아가동산>과 이재록의 <만민중앙교회>, <오대양>까지 네 곳임에도 왜 굳이 JMS에만 이리도 골몰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또 이해가 되기도 했다. 여러 대상보다는 하나의 대상을 표적으로 삼는 것이, 그 해악이나 폐해가 더 커 보이는 곳에 좌표를 찍고 달려드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JMS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물기 쉬운 떡밥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오랜 시간 종교 활동을 했었고, '신학'과 '종교성'에 대해 유독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한 사유의 일환으로 '이단/사이비 종교'는 내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이단(異端)이란 말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쓰여 왔다. 성리학자들이 성리학과는 거리가 있는 유교 학설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이단'이라 규정한 것이 그 대표적 예인데, '정통'과 반하는 교리를 설파하는 종교(집단)로서 이를 신봉할 경우 '결말이 달라진다(=이단을 신봉할 경우 잘못된 길로 빠져 제대로 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는 의미기에 확실히 종교/사상적인 용어다.

반면 사이비(似而非)는 한자로 같을 사, 말 이을 이, 다를 비 자를 쓰는데, 말 그대로 같은 듯 다르다는 뜻이다. 사이비가 한자어인지 몰랐다는 이들도 제법 되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뤄 두고, 종교적 의미에서 사이비란 기성 종교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궁극/본질적으로는 기성 종교와는 성격이 다름을 일컫는 말이다. 기존 종교에서는 대개 '도덕'에 합치하는 가르침을 설파하는 반면, 사이비 종교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그런 말을 하지만 파면 팔수록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가르침을 설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람들로 하여금 지탄을 받는다. 물론 이단 종교든 사이비 종교든 세(勢)가 기존 종교에 비해서는 다소 약하기 때문에 각종 봉사 활동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갖추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는데, 그 안을 들여다 보면 상당한 수준의 자기 착취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으며, 결국 사회의 인정이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교주'와 소속 종교 집단의 인정을 받으려는 목표가 전부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리도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이들이 많은지 의아해하며, 그 구성원들을 일러 멍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없다고, 뭔가 삶에 부족함이 많아 그런 데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며 비난하기도 한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멍청하니 말도 안 되는 유혹에 빠질 것이고, 부족함이 있으니 그런 곳에 투신할 것이고, 생각이 없으니 맹신을 넘어 광신의 지경에 이르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사건의 표면만을 보고 얕은 수준에서 사고하고 말하는 것이지 본질을 짚은 처사는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조차 수많은 '믿음'이 시간과 공간을 교차하고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종교 생활을 그만둔 후, 종교와 세속을 관조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한때는 종교의 입장에서 세속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세속의 입장에서 종교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과연 종교와 세속이 얼마나 다른지 고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바라본 결과, 종교나 세속이나 사실 비슷하며, 어쩌면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왜냐, 관건은 믿음이기 때문이었다.

종교에 있어 믿음은 미덕을 넘어 의무에 해당한다. 어떤 방식의 종교 생활이 바람직한지를 성찰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단 종교는 믿음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성립할 수 없다. 종교 교의(교리)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수 세기에 걸쳐 사고의 축적으로 형성된 체계라 해도 어차피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그 체계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종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있어야 생각에도 의미가 있다. 다만 그 생각이 믿음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계속해서 종교라는 믿음 체계에 몸을 담글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세속은 당연히 믿음의 아닌 이성의 영역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사실 성급한 태도다. 세속이 이성의 영역이라고? 천만에. 종교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것 이상으로 세속에서도 믿음이 강조된다. 일단 세속을 구성하는 '세속주의'에 대한 믿음이 그러하다. 종교 정치가 상호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되, 종교의 자유는 보장된다는 내용의 세속주의 또한 세속 사회를 구성하는 믿음의 하나다. 세속주의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특정 종교가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법적 그리고 인식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것다.

한편으로는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사회가 민주주의를 규정한 헌법을 신뢰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더는 그 정치-사회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비록 시간이 흐를수록 투표율은 떨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투표소에 가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그 행위가 '민주주의'라는 신념 체계를 보장하고 또 전제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 투표야말로 '나'와 '너'에게 정치적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실체적 행위라는 믿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제일 요소다. 만약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무너지면, 사회는 군주가 다스리는 일인 전제정으로 회귀하거나 특정 계급(계층)이나 소수에 뜻에 의해 운영되는 과두정체로 전환된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시민)'의 믿음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흔히 이러한 시각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 어떻게 종교와 정치 사상을 같은 맥락에 둘 수 있냐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종교에는 숭배 내지 추앙의 대상이 명확히 존재하며, 종교적 절대자나 창시자가 남겼다는 말(글)을 기반으로 당사자의 삶이 유지되는데 정치 사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정치 사상인 '공산주의'를 보라(공산주의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철학, 심지어는 사회학에 걸쳐 있다). 칼 막스(Karl Marx, '카를 마르크스')가 집필한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은 공산주의 세계의 성경이다. 전 세계에 걸쳐 발생한 공산주의 운동과 공산주의화는 막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전개되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나타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상이 결합된 '막스-레닌주의'에 입각해 최초의 사회주의 국체인 소비에트 연방이 결성되었다. 레닌주의는 막스주의를 해석 및 적용하는 하나의 방식이라 이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있었지만, '소련'이라는 국가의 상징성과 영향력을 고려할 때 막스-레닌주의는 공산주의 세계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공산당 선언의 한 구절이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조직적인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도록 했다면, 이것이 과연 종교와 무엇이 다르냐는 의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단 정치 사상을 떠나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믿음은 흔함을 넘어 거의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단적으로 내가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쓰는 것도 갑작스런 천재지변이나 적의 돌발적 공습으로 인해 집이 파괴되지 않으리란 매우 기본적이면서도 근원적 차원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퇴근 시에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들도 '내가 차를 몰 때 사고를 당해 크게 다치거나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버스가 다른 차/도로 구조물과 충돌하지 않으리라', '열차가 선로를 이탈해 전복되지 않으리라'는, 인지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수준의 믿음을 갖고 있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반대는 이성(理性)이 아니라 '불안'이다. 불안에 휩싸인 사람은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어떤 요소로 인해 야기될지 모를 각종 불안을 잠재우고 안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 요소에 해당한다. 심지어는 우리가 과학의 영역이라 굳게 믿는 '지동설'과 '타원형의 지구 형태'마저도, 관측에 의한 사실로 판명되었다 한들 이를 사실을 넘어 진리로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과거인은 천동설을 믿었던 것이고, '평평한 지구 이론'을 신봉하는 이들이 아직도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앎과 사실이란 객관의 영역에도 믿음은 늘 개입한다.


이를 이해했다면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에 도대체 왜 빠지느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답은 간단하다. '믿음'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삶을 이끌어 줄 것이란 믿음, 나의 인식 체계를 형성한다는 믿음, 그것이 바람직하며 옳다는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종교'에 발을 들이밀어 끝내는 아예 푹 빠지게 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이 쉽게 물신주의(물질만능주의)에 빠지는 것도, 국가주의자가 국가의 이익을 앞세워 그 어떤 가치도 허용하지 않는 것도, 민족주의자가 오로지 민족의 통합만을 외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든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치 체계를 기반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듯,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하필 그러한 쪽으로 자신의 믿음을 기울인 것뿐이다. 그런데 '믿음'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맹목성을 수반하기에, 이를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다른 생각을 허하지 않게 되고, 끝내 나와 다른 이를 다치게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뭐가 문제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타인의 충고가 유효할 리 없으며, 오히려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우매하고 아둔한 존재 취급하고 심지어 해당 가치 체계의 모순을 깨닫고 이를 벗어나는 이를 '배신자' 취급하여 백안시하는데다 심지어는 그를 대상으로 사적 보복을 감행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대표적으로 故 탁명환 연구가(1937-1994, 흔히 '탁명환 소장'이라 )를 들 수 있는데, 개신교 신자로서 신흥 종교와 그 해악성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던 탁명환 소장은 한 광신도에 의해 칼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뿐인가? 민족주의 우파로서 한반도 단일국가론을 외쳤던 백범 김구(1876-1949)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했던 군인 안두희에 의해 살해당했고, 민족주의 좌파로서 또한 민족-국가 통합의 선봉에 섰던 몽양 여운형(1886-1947) 선생 또한 극우파로 추정되는 이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내가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가르침/이념'을 문제시하고, 그에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종교뿐만 아니라 이념 또한 사람의 인식과 행동을 좌우하는 주요소임을 제시한다.


내가 (사회/종교학적 용어로) '탈종교' 상태에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려되는 점은 한국 사회가 무종교 비율뿐만 아니라 종교적 무관심도가 매우 높다는 것이다. 단순히 종교가 없다는 것만으로 문제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종교적 무관심은 문제다. 왜냐, 비록 무종교의 비율이 절반 가량이은 곧 종교를 갖고 있는 이들 또한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많다는 것인데, 종교적 무관심은 곧 인구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해할 의도가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급속도로 근대화(서구화)되면서 특정 사상/종교에 대한 절대 우위 상태를 벗어나 여러 종교가 비율상 상대적 우열 관계에 있는 지금, 그야말로 '다종교 시대'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종교에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것은 종교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사회 문제에 그만큼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떨어짐을 의미하기에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다. 반JMS 단체의 대표인 김도형 교수가 지적했다시피 이미 정명석은 3-40년 전부터 활동을 시작해 왔는데 이제서야 공론화가 된 것도, 또한 1970년대에 활동을 시작하여 수십 만 명의 교인을 거느리고 있는 이만희의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도, 심지어는 1950년대에 창설되어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문선명(2012년 사망)-한학자의 이른바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 대한 무관심은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탈종교화되면서 발생한 반사적 폐해라 할 수 있다. 저들은 스스로를 하나님 내지 재림 예수라 지칭한다. 그리고 그에 맞게 각종 교리 체계를 수립하여 수많은 신도를 현혹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으로 그 손을 뻗어 자신들의 입김을 행사하려 부단히 노력해 왔고, 이는 실제로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이에 관심이 없으면 그저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을 '저 사람이 멍청해서 생기는 문제'로 치부하게 되며, 그렇게 그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알게 모르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들의 배를 불리는 행동을 하게 된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적극 활용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는 '믿음'을 자꾸 종교와만 연결해서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을 쓴 목적이 바로 저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사소한 것마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판이할 수밖에 없으며, 본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위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하고, 오히려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에는 과민 반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무엇이 위기인지 오판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고, 그것이 개인과 사회를 실로 파멸적인 상황에 밀어넣을 수 있음은 충분히 가능한 예상이다.


말의 교차는 곧 생각의 교차이고, 생각의 교차는 또한 믿음의 교차와도 같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것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근원적 차원에서 인식해야만 '사이비 종교'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충돌과 대립으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이해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다. 함부로 타인을 어리석은 이로 매도하지 않기 위해, 사건의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 세속 사회의 구성원은, 그리고 특히 한국인은, '믿음'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그래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결여된 시대에 믿음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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