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신의 이름으로 세워진 법이 세상을 지배하였을 때
인간은 그것이 신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이를 금과옥조로 받들어 지켰지만
정작 인간은 이로써 다른 인간을 억눌렀고, 누군가는 이에 억눌린 채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수많은 이들이 그것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애썼으나,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고, 인간은 신과 이어지기는커녕 더욱 단절되어 갔고, 고립돼 갔다.
천 년의 시간이 흘러, 자신에게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인간이 곧 신의 법의 무용(無用)함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워졌노라' 선언함으로써 비로소 해방되었고, 신의 법은 끝내 인간의 법으로 대체되었다.
신과 그의 법을 끌어내린 인간은 믿었다.
인간의 법은 공명정대하며, 억압과 예속, 착취와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러나,
인간의 법이 세상의 유일한 원리가 된 이후
그것은 신의 법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자 되레 인간을 구속하고 억누르기 시작했다.
신의 법은 본질을 잃었노라고, 아니, 애초에 신의 법은 엉터리였으며 심지어 가짜였다고 외치며 이를 철폐하고 만든 인간의 법이, 완벽하게 그 자리를 꿰차자 또 다시 독단의 근거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게 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이어졌던 지상(地上)의 제위를 탈환한 인간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찬탈자이자 참주처럼 행동하였고, 그 자신이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원칙을 스스로 부정해 나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신의 법이 인간을 보호해준다는 믿음이 깨지고
신의 법이야말로 인간을 매이게 했다는 믿음이 세상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인간은,
이제 인간의 법이 외려 인간을 지키기는커녕,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더욱 세세한 조문과 복잡한 해석으로 인간의 삶을 묶어 가고 있음을 부인한 채, 그것만이 인간을 이끌 수 있고, 구원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폭주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인간은 더는 신의 법의 힘 아래에 놓이기를 원치 않는다. 설령 그것에 일말의 긍정적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신의 그늘에 있으면서 죄의식에 신음했던 인간에게 이미 회귀는 죄악이다.
하지만,
해방을 외치며 달려나온 인간은, 예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심지어는 신의 법이 지배했던 시대만큼이나 스스로를 얽매고 있다. 그리고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 뭔가가 잘못돼가고 있다 말하는 이들을 반역자로 지목하여 그 입에 재갈을 물린다.
이제 인간은 진퇴양난의 길 위에 있다.
돌아갈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나아가지도 못한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는 자신에 대한 더 큰 실망으로 돌아오며,
걸음을 떼면 뗄수록 발에는 자꾸 상처가 나 피를 멎게 하기에 급급하다.
인간은 무언가를 '괴물'로 지목하고 그것에게서 도망쳐 나왔으나, 결국 자신마저 괴물의 화신이 되고야 말았다.
자유를 위해 뛰쳐나왔건만, 자유를 외치며 법의 잣대를 엄격히 들이밀수록 자유는 사라져만 갔으며, 동시에 인간의 법에 대한 믿음도, 인간 자신에 대한 신뢰도 떨어져만 갔다.
이것이, 신의 법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법을 수립한 것의 결과라면, 이 얼마나 절망스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