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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Apr 21. 2022

코로나-19 시국의 현(現) 사회를 돌아보다

돌아보지 않으면, 남는 것은 품었던 환상에 대한 절망뿐이다.

코로나 얘기를 꽤 자주 하게 된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 썩 긍정적이진 않다. 그만 좀 얘기하고 싶어서다. 3년째 지속되는 이 상황이 어찌 달가울 수 있을까? 근데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건,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결코 코로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임을 알고 있기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의견을 표출하고자 한다.

이 글도 그러한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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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덮친 시점부터 나는 늘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왔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바라왔던 사항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상황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때가 낫다.).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인간은 바이러스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백신도 치료제도 경구약도 그다지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뭐, 난 백신 무용론자는 아니라 백신이 완전히 무효했다고는 말 안 할 거지만, 적어도 정부와 언론, 의료계에서 입이 닳도록 언급했던 '집단면역'은 결국 백신 수급 문제로 형성되지 못했고(이론적으로 짧은 기간에 다수가 동시적으로 맞아야만 백신을 통한 집단면역이 형성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7-80%에 도달하기까지 몇 개월이 걸려 목표 달성에 실패함), 그 사이 감염력 높은 변이의 발생으로 수십 만 명의 감염자가 발생했다. 과학적으로 바이러스의 감염율이 높아지면 치사율은 그만큼 떨어지지만, 감염자가 절대적으로 많이 발생하면 이에 비례하여 사망자가 늘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의견과 아직 코로나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으므로 방역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물론 권위(현재로서는 정부의 지침)에 순종적인 한국인의 특성상, 나를 포함하여 공적 영역에서 이런 담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전무(全無)한 수준이고 이런 담론은 오로지 인터넷 영역, 그중에서도 기사 댓글란에서나 뜨겁게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만약 한국인의 성정 자체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을 추구하는 쪽이었더라면 말이 달랐겠지만 기본적으로 하라면 하는 것에 익숙한 역사·문화적 맥락상 그러기도 쉽지가 않은 것도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기 어렵게 하는 요소다. 더욱이 보신주의가 워낙 강한 나라라 자신에게 해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점은 금방 죄악시하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듯한) 이는 악한(惡漢)에 무뢰배 취급을 하는 것이 금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드러났다는 점에서, 절대 다수가 결집하여 국가가 제한한(=앗아간) 자유를 돌려달라 말하는 일이 그리 쉽게 일어날 것 같지도 않다.


그렇게 바이러스 대유행 사태가 터진 후로 2년이 지나 3년째가 된 2022년, 많은 나라에서 방역을 전면 중단하거나 마스크 착용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겼음에도, 대한민국은 아직도 코로나와 전쟁을 벌이는 몇 안 되는 나라다. 예전처럼 동선을 추적하여 PCR 검사를 받게 하고 접촉하기만 해도 격리시켰던 방식은 중단했지만 방역의 핵심이자 기본으로 여겨지는 마스크 착용은 그대로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이상으로 방역하는 국가로 대만(Taiwan, 'Republic of China')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 여기나 거기나 방역을 쉽게 놓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한국 및 대만 정부에서 방역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할 경우 이에 따른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만의 민진당 정부와 한국의 민주당 정부는 각각 방역을 통해 어느 정도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특히 대만의 경우 홍콩의 민주화 시위로 인해 높아진 반중 감정을 힘입어 방역을 강하게 시행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그들이 방역을 중단하겠다 하는 것은 정부 성과를 스스로 부정하겠다는 꼴이기 때문에 결코 그리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단, 중국은 얘기가 다르다. 거긴 아예 일당독재 권위주의 사회기 때문에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벌금을 넘어 물리적 처벌을 받으므로 정부에 항거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국과 대만의 전력을 고려하여 예상컨대, 적어도 두 국가는 예전처럼 국민의 자유를 계속 제한하는 식으로 갈 것이라 본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적잖은 숫자의 국민이 그걸 바라고 있기 때문에 정책을 뒤엎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웃긴 건 그것이 정부를 전적으로 신뢰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부 입장에선 이를 포기하는 순간 상당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고, 그것이 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더욱 방역을 끌고 갈 것이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가 사회적 거리 두기는 해제했음에도 마스크 착용은 강제하는 모순된 행보를 보이는 이유다. 내가 늘 강조하는 점인데, 방역을 중단한 국가의 정부가 인간 존중의 가치를 홀시하거나 무능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님을 고려하면 한국의 조처는 분명 과하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이 여전히 강한 상황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국민은 절대적으로는 다수라 한들 상대적으로는 소수일 수밖에 없고, 아무리 과반을 넘지 않는다 한들 상대적 다수의 주장에 좌우되는 민주주의의 취약점에 의해 한국 사회는 계속해서 기존의 방식을 고수해 나갈 것이다. 그렇다 해서 마스크 착용 강제를 요구하는 국민이 단지 '적지 않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쩌면 절대적 다수이자 상대적 다수로서 과반 이상을 점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유로(혹 그렇지 않다 해도 정책 시행에 따른 습관화로 인해) 만약 개인이 '정부의 방역정책의 비합리성'을 이유로 실내외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 사람은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거주 지역이 어디건 일차적으로 대중교통을 탈 수가 없다. 버스는 기사가 타자마자 승객을 대면하므로 승차를 거부할 것이고, 지하철의 경우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로 타면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눈총을 받음과 동시에 차장에게 민원이 제기되어 마스크 착용에 관한 안내 방송이 나올 것이다. 그토록 탈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외쳐 온 한국인 정작 '비상시국'이란 이유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타인의 '일탈'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고, 그는 철면피가 아닌 이상에야 도저히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 솔직히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 있긴 싶겠냐마는, 일단 얼굴에 마스크만 씌워져 있으면 코에 걸치든 입이 나와 있든 간에 사람들은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이건 모든 한국인이 마스크가 나와 남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모두가 쓰니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긴다는 뜻과 같다. 지금으로서는 건강을 위해 착용을 강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겠지만, '모두가 2년 넘게 썼는데 당신이 뭐라고 안 쓰느냐'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난 바이러스 대유행 초기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서방의 수많은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들이 들었을 리 없지만 왜 모두를 위하지 않느냐, 왜 그리 이기적으로 행동하느냐 말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그런 삶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 한들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 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서양인에게는 기본값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셈이다. 어쩌면 한국인이 이런 상황을 직면하여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는 것은 그리하지 않으면 개인의 생존이 심하게 위협을 받았던 전력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사태가 한참 진행된 후에야 들었다(외침外侵이나 국가권력-독재정권-의 전횡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경우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만큼 서로의 기준이 달랐고, 누가 누구를 비난할 일이 아니었음을 시간이 꽤 지나서야 깨달은 셈이다. 그들로서는 '내 몸에 이상이 없는데 내가 왜 마스크를 써?'란 생각이 너무나 당연했기에 건강에 문제가 없음에도 (그야말로) 선제적으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해 보였겠지만, 한국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을 두고 '왜 마스크를 쓰지 않지?'란 생각을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이 어쩌면 무색한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분명 있다. 만약 서양에 거주하는 누군가와 한국에 거주하는 누군가가 마스크를 착용하는, 또는 착용하지 않는 이를 보고 '왜 저러나' 하고 생각으로만 그쳤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서양의 누군가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을 비난했고, 한국의 누군가는(절대 다수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했다. 남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엄연히 잘못된 행동이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이 부정적 효과를 낼 가능성을 내포한다 해도, 이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며 지나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이유는 아무리 마스크를 쓴다 해도 담배 냄새가 유입되는 것은 절대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방독면을 쓰면 모를까, 담배 냄새 피하자고 그리하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다 쳐도, 갑자기 키를 늘리거나 줄여 연기를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스크 착용은 얘기가 다르다. 누군가가 마스크를 쓰지 않음으로써 상존하는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한들 다른 누군가가 마스크를 씀으로서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다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단 이유로 그 사람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원칙을 이해했다면 마스크를 쓰건 말건 누군가를 욕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매우 반자유주의적 행태이고, 본인에게 감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있음에도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행위임에도 사람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나와 다르게 는 이를 비난했다. 난 그때의 내 모습을 반성해 왔다. 정부의 방침에 따르지 않았단 이유로 그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려 했던 이를 무분별하게, 불필요하게 '나쁜 인간', '이기주의자'로 매도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솔직히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훗날, 시간이 꽤 흘러 마스크 착용을 원치 않게 되었을 때, 이미 한국 사회는 완전히 마스크 착용이란 가치에 장악된 후였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대역죄인 취급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실현한다는 것은 이 사회의 특성상 불가능한 일과 다름없었고, 나는 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타인을 이기주의자로 몰았던 일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겠단 이유로 내게는 어느새 이기주의자란 낙인이 찍힌 것이다. 내게 만약 미래를 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바이러스에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타인을 무작정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른바 '코로나 시국'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과연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채택하고자 하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말만큼 쉬운 일일까? 난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마스크 착용이란 마치 절도나 살인과 같이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 됐고, 그것이 비록 행정명령의 형태로 강제되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법률을 넘어 헌법을 준수하는 차원으로까지 격상됐다. 그러나 아무리 한국인이 코로나 없는 일상을 바란다 한들, 그런 상황은 향후 몇 년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추측컨대 한 2-3년 정도는 일반 감염병 수준이거나 이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일 것이다.), 현 상황을 미뤄 볼 때 한국인은 여전히 '마스크 착용'을 외치며 방역 강화를 주장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다른 나라는 빗장을 다 풀었음에도 말이다.


바이러스 퇴치 또는 바이러스 대유행 사태 종식에는 '인간의 힘으로 그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숨겨져 있고, 그 낙관론은 '인간은 그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근대성을 전제로 한다. 사실 이 '근대성'이란 것은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이냐는 뒤로 두고서도,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면 그 선전만큼이나 효력을 발휘했다. 인간은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자연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적응'과 '개척'이란 문명의 두 축은 주어진 상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지 근대성이 전제하는 자연 정복 또는 파괴의 수준은 결코 못 됐다. 하지만 근대에 접어들며 인간은 베이컨의 '지식은 곧 힘'이란 명제를 기반으로 전에는 파악하지 못했던 자연의 속살을 낱낱이 파헤치기 시작했고, 이윽고 미지의 영역이었던 자연은 곧 앎을 넘어 통제의 영역에 속하게 됐다. 그 부작용으로 환경 문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문제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근대적 낙관론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이면에 가려진 각종 페해를 감춰 왔다. 그 폐해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 바로 '세계 1·2차 대전'이다. 인류의 삶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발전시킨 과학기술이 도리어 인류를 대규모로 살상한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그러나 인류 역사상 제일 참혹했던 이 사태를 두고서도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개선시켜주었다고 확신해 온 근대성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근대성은 여전히 인류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여전히 인간이 모든 것의 주관자라고, 인간이 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속삭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3년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게서 여전히 해방될 수 있다고, 그 주체는 바이러스가 아닌 바로 우리 인간이라고 여기게 하는 가장 주된 이유다.

그런 이들에게 방역은 필수적이다. 방역 중단은 곧 포기로 연결되고, 포기는 곧 인간이 바이러스 앞에 무력함을 자인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힘을 합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구호를 믿어 온 근대성의 신자들은 결코 이쯤이면 됐다고, 방역을 중단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가열차게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그래야 바이러스 침투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만 근대성을 기반으로 한 스스로의 신념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국가의 책임 및 역할론이 계속 강조되어야 하고, 정작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그 역할이 제한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던 정부는 끊임없이 개인의 기대와 '근대성이란 환상'을 충족하기 위해 모두의 삶 곳곳에 손을 뻗어야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개인이 스스로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지고, '내 삶의 주인은 나'란 20-21세기의 명제는 점점 공허한 구호가 되어가고 만다.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는 듯하다. '현대'라 불리는 21세기에 벗어날 수 없는(정확히 말하면 벗어날 생각이 없는) 근대성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긴커녕 오히려 속박의 늪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전지전능성에 대한 신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한 21세기 인류는, 적어도 현 시점의 한국인은 스스로의 손으로는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며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지켜야 할 자유를 국가에 헌납할 것이고, 국가는 우리 삶에 매우 온정적인 형태의 '빅 브라더'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설령 천운으로 바이러스 사태가 전적으로 인간의 손으로 해결된다 한들, 이미 수많은 개인의 삶에 손을 뻗쳤던 정부는 그 손을 쉽게 거두려 들지 않을지 모른다. 개인은 국가권력 앞에 절대적으로 무력하기에, 아무리 국가에게 '이제 되었으니 물러가라' 외쳐도 국가는 그 외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부분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이는 문화와 국가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공통적이면서도 중요한 질문은 '인간의 삶의 방식이 과연 (앞으로도) 이러해도 되는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얼마나 우리 모두에게 유의미한지는 둘째 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두고 깊이 고민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여전히 '감염 위험'을 들어 기존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자(감염을 막기 위해 각종 매장에서 일회용품을 사용해야 한다 주장하는 것 등) 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동시에 '감염 위험'을 이유로 기존의 삶의 방식(마스크 착용을 예전처럼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에 맡기는 것)을 유지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한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점에서 두 가지 상반된 주장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려준다. 근대성의 수혜자로 수백 년간 지구의 모든 것을 도구로 삼아 풍족한 삶을 누려 온 많은 사람들은 정작 그 근대성의 폐해이자 심각한 부작용인 바이러스를 맞닥뜨려 아직도 그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음에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시금 근대성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인류와 한국인이 직면한 모순이다. 난 하루빨리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이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중세 유럽 사람들이 멍청해서 흑사병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고, 근현대의 분기점에 살았던 이들이 어리석어서 이른바 '스페인 독감'으로 죽어나갔던 것이 아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기술의 미발달로 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죽은 것이지만, 코로나 사태가 보여주듯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한 문제를 해결하려다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애초에 인류는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겠다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향해 달려나갈 뿐이었고, 그것이 실현되는 듯 보였지만 결국 손을 아무리 뻗어도 그 목표는 끊임없이 멀어질 뿐이었고, 동시에 도장 깨듯 달성한 모든 목표가 실로 예상치 못한 악영향을 내포하고 있음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항생제 '페니실린'의 개발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지만, 이에 내성을 지닌 슈퍼 박테리아의 등장으로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려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했고, 손댈 수 있는 것에는 손을 갖다 댄 인류에게 얼마나 큰 후폭풍이 닥칠지는 '당장 이곳,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점일 것이라 본다. 이 시점에서 아무리 이를 떠들어봤자 방역에 협조하지 않는 이기주의자 취급을 받을 테고, 전 국민의 3분의 1이 감염된 상황임에도 감염되면 곧 잠재적 살인자 취급을 당하는 형국이니 별 의미는 없을지 몰라도,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현 상황을 통찰하는 이라면 나의 이러한 견해를 마냥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이야말로 한국인과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마 향후 몇 개월간 한국 사회는 마스크 착용 강제 찬성과 반대로 싸울 것이고, 언론은 각자의 시선대로 기사를 쏟아낼 것이다. 나로서는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는 것은 현 상황상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므로 당장 실내외 착용을 전면 자율화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라 보지만(과연 상황이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것만큼이나 악화될까 싶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현 정부가 '정부 역할론'에 충실하는 이상(차기 정부도 그러한다는 전제 하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의 주장이 쉽사리 실현되기란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을 떠나 한국인이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각종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방역을 명목으로 던진 부메랑이 모두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며, 그 몫은 당장 현 세대뿐만 아니라 훗날 사회의 주역이 될 미래 세대가 오롯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에 따른 비난과 질책은 오로지 2022년 4월 21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받게 될 것이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이들을 이기주의자라며 비난했던 이들이, 도리어 다른 이들에게 이기주의자 취급을 받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왜 그렇게 자신들만 생각했느냐'고,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느냐'고 말이다. 과연 그때가 오면, 코로나 시국을 경험한 세대는 그들을 이기주의자라 비난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염려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그때 가서 나까지 '이기주의자'로 매도하는 이들에게 '나는 안 그랬다'며 항변한다 한들, 그들이 나를 예외로 삼아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 본인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브런치에 재(再)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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