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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14. 2022

중국의 코로나 대응책을 보노라면

한국인에게는 중국 정부의 대응이 과하다 비난할 자격이 없다.

*지난 5월 11일에 본인의 블로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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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에서 상하이 봉쇄를 시작으로 수도 베이징까지 봉쇄하면서 많은 중국 국민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공교롭게도 이에 발맞춰 중국 푸단대(復旦大學)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에서 제로 코로나 정책을 중단하면 160만 명의 사망자가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기사 내용을 그대로 옮기자면 '중국이 제로 코로나 정책을 접을 경우 5~7월에 대유행이 번지면서 1억1220만 명이 감염될 것으로 전망됐다. 입원 환자는 510만 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160만 명에 달할 것이란 관측'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中, 제로 코로나 정책 중단하면 160만 명 사망할 수도", 허세민 기자, 한국경제, 2022.05.11.). 이것이 현실화될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당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성립하므로 저 연구가 진정 객관적인지에 대해선 쉬이 평가하기 어렵다.


지난 문재인 정부를 비판(내가 보기엔 그저 비난이지만)하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감염된데다 사망자가 2만 명에 달하는 것을 들어 정부가 방역에 실패했다 말하며, 더군다나 최근 실외 마스크 의무 착용 정책을 해제한 것을 두고 국민을 다 죽이려 한다며 무차별적 비난을 가하고 있다. 한국의 자칭 우파들이 대개 이런 비난을 가하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자칭 좌파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인다. 그들은 문재인 정부의 방역이 실패했다는 주장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단 점에선 우파와 다르나, 정부에서 방역을 완화(실외 마스크 의무 착용 해제,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PCR 검사 의무화 해제 등)하는 것에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에선 공통점을 지닌다. 이로써 한국의 좌우는 정부(정권)에 대한 견해는 달라도 궁극적으로'방역 완화'에 비판 내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점에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방역과는 별개로 한국의 좌우가 공통적으로 지닌 견해가 하나 더 있는데, 이는 바로 중국에 대한 입장이다. 무슨 입장이냐, 두 세력 다 중국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우파의 경우 수십 년간 이어진 레드 콤플렉스를 그대로 갖고 있는 반면 좌파의 경우 레드 콤플렉스가 우파보다는 조금 덜하다 한들 '전체주의 정권의 압제'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에 중국에 우호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의 좌우는 이렇게 '인민'에 대한 당의 절대 우위를 근거로 중국 국민을 통제하고 특히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중공의 행태에 일종의 혐오감을 갖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중국이 싫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방역을 해 왔던 과정을 살펴 보면 과연 중국을 마냥 싫어할 만큼 한국이 중국과 다른 행보를 보였는지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냐, 사실상 한국은 '봉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방책을 사용하여 방역을 진행해왔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한국 사회 특유의 눈치 및 집단주의가 코로나 대유행 시기에 십분, 물씬 발휘되어 정부 지침과 사회의 보편 인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에게 즉시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방역이란 대의를 몸과 마음을 다해 따르지 않는 사람(의도치 않게 중의적 표현이 됐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철저하고 적극적으로 방역에 동참하지는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에게 공적(정책적) 제재가 가해지기도 전에 사적(관官이 아닌 개인·집단적) 제재가 가해졌고, 이로 인해 정부는 생각보다 손쉽게 방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 가슴에 손을 얹고 객관적으로 우리의 지난 모습을 돌아보자. 중국은 안 따르면 잡아 가두는 분위기를 형성했기에 저렇게 과도한 정책이 지속되었지만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중공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확진자와 사망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한국은 안 따른다고 잡아 가두진 않았다. 하지만 정부 정책의 강도와는 별개로 개인 또는 집단의 개인에 대한 사적 제재로 인해 방역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방역 지침을 적극적으로 준수하지 않는) 이는 사실상 일상 생활조차 영위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시내버스에 탑승할 수 없었고, 전철이 있는 곳에서는 전철을 탑승할 수 없었으며, 그 흔한 마트나 슈퍼마켓, 편의점에 들어가 식료품조차 살 수 없었다. 이것이 순전히 정부 지침이 강력하게, 효과적으로 적용되어 나타난 결과라기엔, 이를 넘어선 개인의 방역 의식(이는 맹종에 가까운 수준이다)으로 인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대의'를 따랐다. 한국인이 중국 정부를 비난 또는 비판하는 점은, '우리는 고도로 성숙한 시민 의식에 따라 자발적으로 정부의 방역 정책을 준수하여 이 정도까지 왔지만, 당신네는 시민 의식은커녕 관에서 일방적으로 지침을 하달·적용함으로써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냐'에 있다. 내가 보기에 이건 전적으로 헛소리다. 중국의 강력한 공적 제재가 '제로 코로나'에 가까운 결과를 도출했다면, 한국은 오히려 강력한 사적 제재가 'OECD 국가 중 방역 수준 최상위(←누적 확진자 및 사망자 수치를 고려한 결과)'란 '성과'를 낸 것인데, 이쯤되면 이런 의문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렇게 따지면 도대체 관이 주도한 것과 민이 주도한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의문 말이다. 이는 국가 정책이 강력히 집행돼서 긍정적인 결과(오로지 '수치'를 근거로 판단된 방역의 성과)가 나온 것이든, 민의 반응이 철저해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든, 그 주체의 차이만 있을 뿐 과정으로 보나 결론으로 보나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오히려 한국인이 그렇게 비난하는 중공의 심각하리만치 과한 방역 정책이, 한국의 경우 정부에선 (물론 정책적으로 늘 강제되긴 했으나) '당부' 수준의 메시지를 냈을 뿐임에도 민의 비정상이라고 여겨질 만큼 과도한 반응(순전히 방역을 위한 반응이든 감염되기 싫어서 보인 반응이든 간에)을 힘입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을 맞이하여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초국가적으로 낮아졌지만, 의외로 권위주의 정부에 대해선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이는 달리 말해 21세기에 있어서는 초유의 대사건인 범지구적 바이러스 확산이 오히려 권위주의 정부가 득세하는 데에 좋은 바탕이 되었다는 의미로, 만약 특정 국가에서 감염자와 사망자가 절대 또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올 수만 있다면 정책의 효과적 집행을 위해선 정부가 일정 수준 이상 권위적인 행태를 보여도 무방하다는 반응이 우세하단 결론이 도출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사람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인데 정부가 강력하게 지침을 시행하지 않으면 되냐'는 인식이 '정부의 방역을 돕기 위해선 모든 국민이 관련된 사항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낳아 실제로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절대 다수의 한국인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자유보다는 생존이 우선시되는 것인데, 이런 논리라면 중국에서 수차례 진행된 봉쇄가 '중국인을 한 명이라도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한 공산당 당국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라 해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그렇게 평가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바이러스 전파를 이유로 사망자의 마지막 모습도 지켜보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가슴 아픈 사례가 너무나 많았지만, 만약 무조건적으로 '중국은 나쁘고, 그들의 정책 또한 과도하다'고 평한다면 오히려 한국 정부의 이러한 조치 또한 비판 또는 비난받아야 마땅한 것이며, 이런 정책이 적극적으로 실시되는 데에 크게 일조한 국민의 위기 의식도 도마 위에 올라야 마땅하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현대 사회에서, 그리고 '코로나 시국'에 여론을 접할 수단이 인터넷 공간 정도뿐인 현실을 감안해도 그러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인은 왜 중국을 비난하는 것인가? 무슨 근거로, 그리고 무슨 자격으로 비난하는 것인가? 중국이 그렇게 과도한 정책을 폄으로써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린 격이라면, 한국 정부와 한국인의 이층적 제재가 그나마 이 정도의 사망자를 내게끔 한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며, 그런 논리라면 오히려 한국인은 중국 정부의 이러한 조치를 칭송하거나 찬양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서방 각국 정부의 강력하지 않았던 정책과 민 차원의 비협조적 태도로 인해 야기된 혼란스러움을 고려하면, 우리와 중국은 잘 한 거라고,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계속 이런 식으로 해 나가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한국은 결코 자화자찬할 입장이 못 된다. 이 모든 것이 결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점임을 그들은 망각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으며, 성공주의적 가치관에 따라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만 하면 그 수단은 곧 유효한 것이므로 그것에 중대한 문제나 모순이 있다 한들 그 폐해를 덮고도 남게 된다. 만약 한국이 이 정도의 방역 성과를 거둠으로써 전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의 반열이 올랐다 말하려면, 한국인은 절대 중국 정부를 비난해선 안 되고, 그들의 정책과 조치가 결코 과도했다고도 말해선 안 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바이러스 대유행을 직면하여 '필요에 따른 권위'를 주장한다면, 그 개인이나 집단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논할 자격이 없다. 현대 사회에서 사실상 권위가 필요에 의해 발동되지 않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윤택한 삶을 위해, 또는 개인이 수렁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개입되는 권위가 합당한 것이라면, 이 험난한 세상을 권위의 도움(개입)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필요에 따른 권위'의 개념이 한번 성립되는 순간 그 범위와 정도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 권위는 철저히 '필요'에 의해 발동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권위는 그다지 탄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다수가 권위에 동의하는 순간 권위는 날개를 달게 되며, 다수가 동의하는 만큼 권위의 시행 주체는 강한 형태로 사회에 손을 뻗는다. 시간이 지나 '이 정도면 됐다' 말한다 해도, 마냥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번 발동된 권위는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역 시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화된 한국인의 이중성이 몸서리치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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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경우 6월 1일에 전면 봉쇄는 해제되었고, 베이징의 경우 6월 6일에 봉쇄가 대폭 해제됐다 합니다. 하지만 감염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함에 따라 언제 다시 봉쇄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치 '얼마 뒤면 바이러스를 통제하여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을 수없이 반복했으면서도 통제에 실패한 한국 정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듯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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