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이냐 심바냐

by 내담자 Jay


하울과 심바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도망’에 있다.

내 오래된 전쟁 중에 하나는 ‘나약한 감정을 뿌리째 뽑아 멸하게 하기’이다.

가장 큰 불이 나는 싸움 중 하나로 그게 내 갈등의 전부라는 말이

필시 과언이었으면 하는 그런 주제.


나는 예전에 엄마 따라 전단지를 돌린 적이 있었다.

홍보지만 붙이고 가위질만 좀 하다 가면 되는 그런 나라사업인 줄 알았는데

전단지도 돌려야 했던..

학교 다닐 때 대학로에서 표 돌리는 알바하고 왔다는 애들을 보면 담도 크지 그랬던

내가 그걸 어떻게 하냐고 그랬는데 일정 마지막날, 비가 오니 굳이 다 돌릴 것 없다며

절반만 전단지 봉투에 넣어주려는 엄마를 말리며

아니야 엄마, 오히려 이렇게 빗방울이 좀 튀어야 호소력 있어. 나 갔다 올게

하고 정말 계획대로 젖은 그 전단지 하나만 두고 전부 돌리고 왔을 때의 그 희열이란.

남아있는 퀘스트가 있는 게 싫은 내 성격상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복귀하는 길, 나는 돌연 아예 전단지만 계속 돌려봐? 정신무장에 이만하게

없겠는 데하며 갑자기 이상한 쪽으로 사고가 섰기 시작했다.


나는 이 말을 그대로 정신과에 갔을 때 했었다.

주치의는 음 왜요? 정말 J님 말대로 정신무장에 괜찮을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

저는 이게 문제예요. 저는 싸워요.

뭐를요..?

앞도 뒤도 자른 내 말을 당연히 의사는 알아듣지 못했다.

뭐랄까 제 안에 나약한? 무른 감정이 있으면 저는 그걸 무찌르려고 해요.

내 터에는 너같이 나약한 녀석이 있어선 안된다면서 제압해서 없애버리려고 해요.

그러니까 그냥, 와 전단지 알바 못할 것 같았는데 했네.

좋은 경험이네 이거, 되게 원초적이다 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거든요

근데 갑자기 이를 갈고 나는 이걸 해서 강해질 거야 이겨낼 거야

정신무장할 거야 하는 식으로 갑자기 투쟁이 되어버린달까..

피하고 싶은 마음, 마다하고 싶단 약한 마음이 들면 그걸 나약하다고 단정 짓고

좀 달래주고 돌봐줘야 하는 마음이 들 때면 달래기보단 더 크게 소리 질러요

엉망이네요. 이래요 내 안이.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의사는 끄덕였다.


예전에 선생님과 심리상담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자꾸 지는 것 같아서, 내가 나약해서 지는 것 같아서 싫다는 식의 말을 했는데

자책을 시작하자 선생님은 단번에 잘라 말했다.

“아니 그럼 파도가 오는데 그거 맞고 서있을 거니? 피해야지 거대한 파도가 오면”

나는 그때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는 한 참이 흐른 뒤, 라이온킹을 다시 보다 우연히 깨달았다.

아 그 말이 그 말이었구나.


라이온 킹에서 가슴 아팠던 건 아직 너무 어린 심바 앞에서 죽어버린

태산 같은 무파사였다. 선물이 있을 거라고 삼촌 스카는 심바를 속여 위험에 빠트리고

그런 심바를 구하고 겨우 자기 목숨도 구한 무파사의 명줄을 스카는 끊어놓는다.

그리곤 심바에게 말한다.

너 때문에 아빠가 죽었으니, 네가 아빠를 죽였으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니 어서 도망가라고.

그래 그때 심바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도망’이었다.

그렇구나 도망쳤구나. 심바가 가정 먼저 한 것은 도망이었다.


심바는 '아니요 엄마를 보고 자초지종을 설명할래요'

'암사자무리에게 앞뒤를 말해주면 이게 사고라고 나를 위로할 거예요'라고 한 것이 아니라,

혹은 가만.. 당신, 삼촌, 스카 너무 이상해

나는 그저 선물을 기다린 것뿐인데.. 너 이거 역모지?

고양이만 한 나는 참지 않고 당신 갈기를 물어뜯을 것이야 하고 덤빈 것도 아니다.

너무 놀라 도망갔고 그건 뼈도 사고도 여물지 않은 심바가 가장

잘한 본능적 행위였다.


삼촌 스카에게 그때 대응하지 못해서,

침착하게 엄마 좀 보고 가겠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해보지도 않고

도망쳐버린 게 너무 바보 같아요, 하이에나 따위에게 꽁무니를 빼며 도망친 게

너무 수치스러워요. 이런 내가 너무 나약한 거 같아요라고

심바가 과거를 그렇게 회고하며 자기를 쥐어뜯는 다면

나는 내가 들었던 그 말을 하겠지

그럼 도망치지 않고 네가 거기서 뭘 어쩌겠다는 거니.

도망쳐야지 그럼.


심바를 문책하는 시점이 있다면 그때가 아닌

아빠만큼 다 자라고도 하쿠나마타다 끄억- 하던 심바부터이다.

닐라가 먹이가 없어 여기까지 날아오게 되었고 그간의 사연과 황폐해진

왕국을 반복해서 설명했음에도 뒤돌아선 심바부터나 가능한 거다.


나는 그러니까 내가 하울이라고 생각했었다.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이 ‘성’인데 거기에 다리를 붙여 도망 다니는

그런 기이한 모습이 항상 내가 한 짓이었다고 말이다.

집 채만 한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나도 이젠 그게 이상한 거 알겠어요.

하지만 내게 온 건 바람이라고요 나는 바람도 버거워하는 바보인 거고요.

바람맞는 게 무서워서 발을 달아 돌아다니는 징그러운 성이라고요.


하울은 평생을 회피하고 회피하며 산다.

문을 바꿔가며 여러 곳에서 산다. 이름도 직업도 그때그때 바꾸며

잊고 싶은 게 생기면 다른 자아로 한큐에 날아가 산다.

그러다 소피를 만나고 지키고 싶은 게 생겼다며 전쟁을 끝내려 불이 난 그곳에서

싸움을 하고 와 다치고 지치고 실신한다.

소피를 말한다, 겁쟁이 일 때가 훨씬 나았어.


차라리 그렇게 겁쟁이일 때가 더 나아, 겁쟁이여도 괜찮으니 돌아가렴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때 그 말은 묵힐 것도 없이 이해했을 건데.

그래도 나는 이제 바구니가 두 개 생긴 사람임음 틀림이 없어서

오직 하울만 있던 내 바구니에서 이제 심바도 생긴 나이다.

‘도망’하면 이제 두 접시가 나오는 나이다.

다만 이젠 그래서 이게 하울이냐 심바냐를 묻는 내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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