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두려움
밝고 웃음이 많던 시절,
내 마음의 종이는 백지와 같았다.
하루하루를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흘려보내며 살던 하얀 종이.
그런데 어느 날부터
검은 물감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검은색은 너무 빠르게,
너무 급하게 종이를 물들였다.
하얀 종이에 번진 불안은
금세 겁이 되었다.
이미 검게 물든 종이 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색을 덧칠해도 예쁘지 않았고,
색연필이든 물감이든
무엇을 써도 더 엉망이 되는 느낌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스크래치 종이를 떠올렸다.
겉은 온통 검은색이지만
날카로운 도구로 상처를 내면
그 아래 숨어 있던 색이 드러나는 종이.
나는 조심스럽게
처음 한 글자를 긁어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다시 한 줄을 긁었다.
“감사하다.”
검은 표면 아래에서
무지갯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둡기만 하다고 믿었던 종이가
상처 사이로 오히려 더 빛나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 나… 다시 살고 있는 걸까?
날카로운 도구로 남긴 상처들이
글이 되고,
문장이 되고,
하나의 색이 되었다.
25년의 끝자락,
검은 종이로 마무리했던 한 해를 지나
26년의 1월과 2월.
완전히 하얗지는 않지만
완전히 검지도 않은
회색빛 종이가 눈앞에 놓였다.
이 회색은
생각보다 그리기 편했다.
밤하늘의 별도 올릴 수 있고,
어두운 바다 위의 달도 그릴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검은 종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회색 종이에
조심스럽게 색을 얹어가며
하나씩 채워본다.
그리고 문득
다음 장을 넘기고 싶어진다.
다음 달,
그다음 달에는
어쩌면 다시
하얀 종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그 위에는
더 아름다운 색들이
조금은 덜 두려운 마음으로
올라올 수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