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씨앗의 시간

태어난 이유

by 리다

어느 씨앗인지도 모르는 작은 씨앗 하나가

땅 아래 묻혀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혹시 내가 흘러 내려가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해가 너무 강한 날이면

이러다 메말라 버려

끝내 태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사계절이 다 지나가도록

나는 여전히 땅속에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같은 자리에 묻힌 채.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오지 마.

건들지 마.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쳐보았다.

함께 묻혀 있던 옆집 씨앗은

어느새 새싹을 틔웠다.

그 작은 초록을 보며

나는 점점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나는 아직도 이 자리일까.

왜 나는 아직 태어나지 못했을까.

옆집 씨앗은 꽃을 피웠고

한 계절을 다 살고

안녕하듯 사라져 갔다.

사라지는 들꽃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태어나는 게 맞을까.

이 모든 걸 견디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정말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많은 감정이 지나가고

또 한 해가 흘렀다.

그리고 어느 날,

내 등껍질이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닫혀 있던 몸이 벌어지고

마침내 땅 위로

푸른 초록의 새싹 하나가 올라왔다.

그 순간

나는 펑펑 울고 싶었다.

아, 내가 태어나는구나.

그렇게 오랜 시간

태어나는 게 맞는지조차 의심하며 버텼는데

막상 태어나고 나니

이제야 모든 것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씨앗으로 있을 때는

비바람이 두려움이었지만

싹을 틔우고 나니

그 비는 나를 자라게 하는 물이 되었고,

뜨거운 햇빛은

나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한 해를 살아내는 들꽃이 된다.

세상을 느끼고,

바람을 맞고,

빛을 받고,

또 하나의 씨앗을 남기고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 아닐까 하고.

이름 없이 피어나는 들꽃도

아름다운 한 송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외로움과 고통을 견뎌냈을까.

그래서 요즘은

내가 어떤 색의 들꽃으로 태어날지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은 아직

천천히, 더디게 도전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도

내 색을 가진 아름다운 들꽃이 되지 않을까.

그날을

조용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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