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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진 Jul 01. 2024

지옥의 문, 감옥의 문, 위로의 문

오귀스트 로댕 <다나이드> 미술에세이로 쓰는 나의 이야기


오귀스트 로댕 <다나이드> 1889

<다나이드>  로댕,  1889      


지옥의 문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은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의 나오는 다나우스왕의 딸을 의미한다. 왕은 자신이 사위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50명의 딸들을 시집보내면서 하룻밤만 보내고 남편을 죽일 것을 명한다. 49명의 딸들을 모두 남편을 죽이게 된다. 지옥에 간 다나이들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퍼나르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끝임없이 노력하지만 목적을 이룰수 없는 절망에 찬 여인을 표현한 작품이다.      

나는 전형적인 밤형 인간이다. 밤에 못했던 일들을 하는 것이 제일 행복 하다. 밤 시간이 아까워 붙잡고 있다 보면 어김없이 기상시간에는 베개에 머리를 박고 온몸을 비틀며 일어나며 괴로워한다.

분명 그 전 몇 시간까지는 행복했는데, 아침만 되면 잠이 모자라 짜증이 올라온다. 옷만 입고 있지 작품 다나이드의 괴로움이불을 못 빠져나오는 아침시간의 내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알람이 수차례 귀를 때린다. 급기야 얼굴을 만지는 고사리 손에 정신이 없고, 올라타는 묵직한 큰아들뼈에  내 살이 눌려 아프다.

나는 이럴 때 내가 자유가 없다고 느낀다. 늦게까지 늘어질 수가 없다. 주말에도 마찬가지다.

먹고 싶지 않은 아침을 안 먹을 권리, 국을 끓이고 반찬을 꺼내여 아침을 차려 먹여야 하는 의무 있몸뚱아리 부엌을 향해 끌려간다.

배고프다고 아우성인 아이들을 위한 식탁차림이 그리도 귀찮을 때가 있다.

엄마제비는 제비새끼들에게 애벌레를 하나씩 갖다 나르는 귀찮은 마음은 없는 걸까? 오늘 차린 밥상이 오늘로 끝이 아니기에 채워지지 않는 독에 물을 퍼나르는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말이다.

아무도 안챙기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아침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감옥의 문  

    

딱 2년 전 이맘때다. 2022.05.05.~05.08 수원아트쇼에 도슨트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나를 제외하고 가족은 짐을 꾸려 처음으로 거제도로 향했다. 도슨트 첫날 오후 2시쯤 사진한장이 날라 왔다. 트렁크에 캠핑살림이 한가득 실려있고, “거제도 출발” 이라고 남겨놨다.

처음 시도하는 남자들만의 여행이였다. 나는 10년만에 처음으로 4일간의 진짜 자유함을 얻은 듯 했다.      

10년 만에 누려보는 혼자만의 아침, 혼자만의 밤, 혼자만의 시간.

TV도 켜지 않은 채 돌아와 적막감을 즐겼다. 적막감이라 쓰고 행복감이라 읽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텐트 속에서 잘 자고 있는건지, 밤공기가 차지는 않은지, 밥은 제대로 해먹는지 궁금해서 전화기를 몇 번을 들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런 걱정의 실타래 속을 헤매고 있는건가 ?     

남편에게 끝내 한마디 들었다 “그만 전화해”

그 말에 서운하진 않았다. 내가 좀 미친 것 같았다.

3일째 되는 날 밤에는 그 조용한 시간을 즐기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밤에 나가보고 싶고, 광란의 밤도 즐겨보는 꿈도 꾸었건만, 갈 곳이 없고, 함께 갈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화 한편을 보고 싶은 생각이나 책을 한 권 읽다 자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안절부절했다. 자유를 줘도 못 누린 것이다.

감옥의 문에서 4일간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못썼다.

아이들이 어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내가” 없다며 울먹울먹했던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아무도 안챙기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 감옥의 문에서 못나왔다. 몸만 갖힌 게 아니고 생각도 갖혀 있었다. 자식 걱정하느라.

자식걱정 안하고 오롯이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충분히 즐겼으면 좋겠다.      


위로의 문  

    

로댕의 여인이였던 까미유 끌로델이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게 되는 영화 <까미유 클로델를 보았다. 그녀는 로댕에게 버려져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동생과 어머니에 의해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꺼내주지 않아 39년간 그곳에서 보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녀의 천재성은 사장되었고 다시는 조각할 수 없는 상태와 세상과의 고립으로부터 그녀는 절규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숨이 막혔다. 울고 싶은데 울어지지도 않았다.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지 못하여 절망하는 다나이드처럼.

로댕을 안만났다면 그녀는 그녀의 동생과 어머니, 로댕과 세상을 향해 원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천재성이 한 순간의 선택으로 망가지다니  그 부당하고 억울한 마음이 감정이입 되었다.  너무 순수해서 어리석었던 그녀 원망 본다.

<다나이드 1889> 로댕의 작품이지만 까미유의 손길과 발상이 고스란히 보인다. 그래서 저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신을 남긴 까미유가 불쌍해서 먹먹했다. 작품에 혼을 넣어 조각할 그 시절에만 해도 그녀가 훗날 정신병원에 버려진 채 39년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걸 몰랐겠지.  까미유의 울부짖음이 머리를 박고 흐느끼는 듯 조각상에 흘러내렸다.      

누구에게나 지옥같은 시절, 지옥 같은 인생의 한 대목이 있다. 나도 한때 그 대목을 떠올리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지옥을 살았다. 과거에 사로 잡혀 감정이 벗어나지 못할 때 그게 바로 지옥이였다. 미워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도 지옥이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도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니까.

까미유 끌로델의 병원 안에서 사로 잡혀버린 인생을 보고 나니, 엄마로서 고귀한 역할과 사명에 대한 값어치를 망각하고는 허상의 자유를 찾아 노래를 부른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를 영화로 세상 밖으로 꺼내준 분들에게 감사하다.

삶이 감옥같다고 아파하고 있을 여러분들!  “지금 우리는 행복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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