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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ramram Dec 22. 2021

인복은 많았지만, 사수 복은 없었다

 어느새 수습 생활을 끝내고 본격적인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사수를 배정받았다. 내 첫 사수는 부장보다 나이가 많은 차장 기자였는데 열정적인 20대 청년의 눈에는 그리 멋진 선배는 아니었다. 멋진 선배가 아니라 함은 배우고 싶은 점이 없는 선배라는 것이겠고 무엇보다 가장 미간을 찌푸리게 했던 건 기자답지 못했다. 여기서 다시 기자답지 못하다는 건 기사를 못 쓴다는 거겠지. 짧은 시간 동안 곳곳에 뿌려진 내 어설픈 눈칫밥을 통해 자연스레 내려진 결론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라 동기들에게라도 내 생각들을 취중진담으로 전하기도 했다.

 “보도 자료만 쓰고 지 일 다 떠넘기고 광고나 얻어 오는 게 그게 기자냐.” 그간 동기들 앞에서 이 정도 강한 어투로 누군가의 흉을 보진 않았지만 나도 그동안 답답함이 쌓였겠지. 어쩌면 누구보다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을 수도 있겠고. 수습이 끝날 때쯤은 내가 그동안 써오던 글이 굉장히 허접한 글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말았으니까.

 이러다 보니 회사라는 그릇이 담고 있는 사소한 특징들을 깨닫기도 했다. 회사에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실력도 있고 인성도 훌륭한 선배, 실력은 있으나 성격 더러운 선배, 그냥 착한 선배, 실력도 없고 인성도 바닥이지만 월급은 축내는 선배. 우리 회사에는 첫 번째 부류의 선배는 없었고 두 번째 부류에는 2, 3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의 선배가 70% 정도 있었고, 나머지 30% 정도가 제일 최악에 속하는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내 첫 사수는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었고 그 사람의 가장 불편했던 점은 후배에 대한 가르침 없이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는 것이었다. 

 “잘하고 있으니 내가 뭐 할 말이 없네?” 

 가끔 뜬금없이 본인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툭 건네기도 하지만 그 말과 그 상황의 온도들을 느낄 수 상대방의 판단에는 그저 이 사람이 귀찮아한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사실 내가 성장하지 못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취재하는 것과 기사 쓰는 건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였고 누구의 가르침으로 본인만의 문체가 확립되는 건 아니니까. 글의 기준은 주관적이라는 괜한 가치관을 다짐하기도 하면서.  

 다만 적어도 기자라면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기본이라고 생각을 하다 보니 글을 억지로 쓰는 선배들을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자라는 직업 가치관과 항상 부딪혔다. 좀 더 격하게 말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기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 인간 자체에 묻어있는 일부 거만함의 태도일 수도 있고 막내의 근본 없는 소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고귀한 글에 대한 본인만의 자부심으로 스스로를 이끌어오기도 했다. 아니면 단순히 내가 모르는 이유를 토대로 그 선배를 싫어했을 수도 있고.  

 원래 사람의 감정을 감추기 어렵듯이 내가 사수에 대해 존중하지 않는 감정도 아마 사수는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에 기자 짬밥 10년 이상 드셨으니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겠지. 그렇게 첫 사수를 만나고 3개월이 지날 때까지도 그와 대화 같은 대화는 전혀 나누지 않았다. 그저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해내면 딱히 그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됐으니까.  

 대학생 때만 하더라도 일을 엉성하게 처리하는 사람을 보면 저런 사람도 있구나. 그래. 사람은 전부 다르니까. 비교적 얌전한 생각들을 하며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지만 직장에서는 달랐다. 사람에 대한 기존의 평온한 마음이 아닌 저런 사람이 회사에 오래 있으면 조직은 성장할 수 없다는 평화롭지 않은 생각까지 이어가곤 했다. 조금은 잔혹하고 냉정하게도. 조직의 성장이 내 개인적인 성장과 이익과도 직결돼있다고 생각했기에 업무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에 대해선 반감이 앞서고 말았다. 아, 여기서 나조차도 업무능력이 형편없는 건 맞지만 내가 말하는 기준은 그 정도를 넘어선 상태의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10년 차 차장이 기사를 엉망으로 쓴다거나 말도 안 되게 게을러 일주일에 4번을 지각한다거나 이겨내지도 못할 술에 매일 쪄들어 다른 사람의 업무에까지 지장을 준다거나.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내 안에 젊은 꼰대의 자아가 갑작스레 등장해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아직은 꾹 참아야겠지. 이제 겨우 명함에서 수습이란 두 글자를 지웠으니까.

 그러고 다시 3개월 뒤, 그러니까 내 사수와의 관계가 6개월이 지날 무렵에 그는 짐을 쌌다. 기자가 아닌 경영 업무와 관련된 회사로 이직했고 사실 속으로는 잘 됐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맡고 있던 일이 내게 다 떠넘겨지는 것도 모르고. 

 “나가서 연락할게. 밥이라도 한 끼 하자.”

 마지막 인사가 씁쓸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첫 사수여서 각별했다는 유치한 말장난도 의미 없었고 단순히 잘 지내라는 말만 건네며 뒷모습을 보지도 않았다. 그러고 며칠 뒤에는 겉치레로만 채워진 줄로만 알았던 식사 제안을 건네기도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해버렸다. 지금 보니 나도 참 냉혈한 피를 가진 인간이구나. 

 평소 인복이 많았다고는 생각했지만 첫 사수에 대한 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던 대학 교직원 생활에서도 내 사수는 눈으로 보기에도 믿기 어려운 이상한 텃세가 가득 차 일을 일부러 안 알려주곤 했으니까.

 “저기 주무관님. 혹시 이것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몇 번을 혼자 해보다가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내 사수에게 물어봤다.   

 “네. 말하세요.”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매사에 툭툭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곳만의 문화로 착각하고 있을 시기였다. 어느 순간 익숙해져버리기도 했지. 

 “죄송해요. 모니터 보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 바쁘니까. 그냥 말로 해요.” 

 어쩌면 이 사람은 내 존재와 내가 내뿜는 숨만으로도 나를 싫어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혹시 그동안 잘못한 부분이 있었는지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화가 겉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을 때쯤은 그 사수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고 말았지. 매번 느끼지만 참는 건 나랑 안 맞으니까.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또 느낀 점이 있다면 회사 내에서 입지를 다지고 싶은 어느 정도의 야망이 생기기도 했다. 적당한 일 적응 후에는 곧바로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대부분의 사회초년생들이 그럴 것이라 믿는데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출입처와의 저녁자리를 단번에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부지런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때부터는 사실 딜레마에 빠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어떤 분야에 있어 욕심과 목표가 생길 때에는 스스로를 가두는 축에 속하다 보니 내가 지금 연애 따위를 할 시기냐며 채찍질하기도 했다. 우발적인 성향도 조금은 섞여 있는 건지.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더라도 오랜 시기 동안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바로 휴대폰을 없앤다거나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수개월 동안 사람들을 안 만난다거나 내게 방해될 것이라 생각하는 요소들은 곧바로 제거해버리는 게 내 그동안의 철칙이었다. 그래서 업무에 대한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에는 괜한 화풀이로 연인과의 시간들이 불필요하다고도 생각하고 심지어 연인이 없으면 나는 직장 내에서 더 두드러진 성과를 보일 것이라는 아주 단편적인 시야에 갇혀버리는 인간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들이 대부분 비슷하다고, 이 시기에 내 주위의 연인들만 보더라도 그들의 이별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뭐 이런저런 이유가 많겠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었던 건 세월의 흐름이 이유인지 내 철칙에 작은 변화가 일은 건지 사회생활과 사랑과의 관계에 있어 한쪽으로만 극단적으로 내몰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본인만의 감성과 술에 취한 선배는 본인의 낭만을 넌지시 내뱉기도 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 일만 하고 있으면 나중에 후회되지 않겠냐?”

 한국 사회에서 낭만 쫓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도 하지만 이 시기 내 우선순위는 먹고사는 것보다는 더 행복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행복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습관처럼 아무렇지 않게 사랑과의 단절을 마음먹다가도 어디선가 다시 생각하라는 선명한 음성들 덕분에 나는 내 우선순위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성공에 목말랐고 먹고사는 것을 두려워했었는지 자책과 회개를 번갈아 하면서. 

 기자라는 직업은 상당히 매력적인 직업이지만 안 좋은 점도 하나둘 깨닫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있다면 성격이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금 더 격하게, 쉽게 말한다면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고 있다는 말이 가장 적합하겠다. 본래의 내 성격을 나열해본다면 워낙 내성적인 성격에다가 거의 모든 일들에 먼저 나서지 않고 그렇다보니 불같이 화내야 될 때가 되면 화내는 내 모습이 상상만으로도 어색해 울분을 삭여버리는 정도가 떠오른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본래의 내 성격이 아니라 회사에서 새롭게 생성된 내 자아의 성격이겠구나. 간혹 기사를 보고선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직접 전화가 오기도 하는데 대부분 항의전화다. 기사를 잘 봤다고 굳이 칭찬하려고 전화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 대부분의 항의 전화에서는 “현장 상황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기사를 쓰느냐.”, “취재원이 누구냐.” 등의 무난한 항의가 있다면 심한 경우 소송예고를 포함해 “당장 찾아서 죽여버리겠다.”는 아주 흉악한 항의전화를 받기도 한다. 

 입사 교육 당시 우리 언론사는 모든 항의 전화에 무조건 매너 있게 대응하라는 매뉴얼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입사 초반 때까지만 하더라도 “잘 알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유념하겠습니다.” 등 신사의 단어들을 골라 교양 있게 대응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대응이 기자로서의 성숙한 내면을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고. 연말이 되고 입사 2년 차에 접어들 시기가 되어서는 항의전화의 낌새가 느껴지면 당장 전투태세에 돌입해 목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어느새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버리기도 했다. 싸움닭이 되는 것. 상대가 예의를 갖출 의지가 없다는 신호탄을 던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아니, 내 말 먼저 들어봐 봐요.”, “그래서 기사에 틀린 부분이 있냐고.”, “그러게 진작 일들 좀 잘하지.” 언뜻 보기에 양아치 소리도 어울릴 말주변들은 상대가 아버지 연배와 비슷한 공경의 대상이라는 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은 기자라는 직업에 취해있기도 한 걸까. 서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면 결국엔 내 쪽의 승리가 대부분이다. 원래 싸움에서는 잃을 게 없는 쪽이 제일 무서운 법이니까. 

 헷갈리기도 했다. 회사 생활로 인해 고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건지.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재상으로 성장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 진짜 본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 

 잘하고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분명하게 알고 있는 점이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그럴 여유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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