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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ramram Jan 03. 2022

소신이 밥 먹여 주냐?

 마음이 어느 정도 떠난 상태에 도달하고 나니 아침에 눈을 뜨고 출근하는 일은 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기사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고 기사를 작성하는 행위가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라고 생각해 일에 대해 흥미가 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조직에 대한 반감이 주요한 원인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서 남들과 똑같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 것인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삶 속에서 그냥 살아가고 있는 걸까. 

 열정적이었던 내 모습을 돌이켜본다면 아침마다 업무용 노트북을 열 때부터 오늘은 무슨 기사를 쓸지 반짝이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이제는 아침 공기가 달라졌다. 뭐하러 열심히 해야 하는지. 어차피 위에서 오더 내려오면 기사 킬 되는데. 나를 무기력하게 하는 생각들로 힘없이 사무실에 앉아 빈둥대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내가 의지하는 몇몇 선배들에게도 내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했다. 입이 적당히 무거운 선배들을 골라서. 먼저 내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뭔지 판단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부장의 말대로 내가 이번 일로 위축되어 있는 상태인 건지, 이번 일로 이 조직이 싫어진 건지, 경력 4년 차를 코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일이 재미없어진 건지. 어느 하나의 원인보다는 많은 부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선배들은 내 퇴사에 대해 만류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은 기자라면 누구에게나 내리는 잠깐의 소나기일 뿐이니 이번에만 참고 넘어가면 된다는 것이었고 사실 나는 이런 대화에서 이 조직이 더 싫어지기도 했다. 특히 잘 지내던 어떤 선배들과는 같이 술 마시다 또 울컥해버려 이런 식으로 선배들이 매번 참고 넘어가니 변하는 게 하나도 없지 않으냐. 이러면 나중에 후배들이나 조직 성장은 언제 하느냐. 자존심도 없냐.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된다며 따지기도 했고 이제는 대부분의 선배들이 내 이상한 성격을 알고 있으니 가만히 듣고만 있었지. 몇몇 선배들은 선배로서 미안하다며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기도 했다. 선배들을 다그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 선배들이 입사할 때 다짐했던 언론인의 마음가짐을 다시 되새기게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사실 그거면 충분하기도 했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내가 마음이 떠난 이유에 관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점은 이제 일이 재미없다는 이유라고. 언젠가부터 일이 적응이 되고 나서는 업무에 접근하는데 어떤 섬세한 떨림조차도 없이 결국 기사를 쓰는 행위가 창의적인 습작의 행위가 아닌 단순 기계적인 작업이라는 점을 깨달아버렸으니까. 매일 8~10매 정도로 새로운 아이템 기사를 작성하는 건 어느 날엔 30분이면 완성해버리기도 했고 어려운 기사라면 1시간 정도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첫 문장인 리드, 그다음 문장의 부 리드, 하고 싶은 말이 넘쳐 부 리드를 2문장으로 하면 이미 1.5매 정도를 채우고 출처를 통해 통계 수치나 기사의 주요 내용을 중간에 담으면 이미 4매~5매, 마지막 관계자 멘트만 넣으면 기사는 마무리된다. 지면에 있는 내 기사를 볼 때마다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은 뿌듯함에 사로잡혔고 언론에 대한 내 자긍심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걸어온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남들보다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다른 말로 지금보다 더 귀가 얇았을 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안정적이고 틀에 박힌 직업이 내 미래에 대한 행복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대학 교직원 일을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오전 9시까지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직업인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며 다녀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업무가 적응된 후에 나는 교수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내 인생을 허비하기 싫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장 많이 차지했다. 나는 이 생각들이 한 달 넘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리고 내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은 생각들이란 걸 깨닫고는 미래에 대한 어떠한 계획 없이 바로 사표를 제출했다.  

 어느 날은 내가 사회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는 인간인지, 어떻게 남들 다 하는 현실적인 생각 1도 없이 꿈만 좇는 이상적인 생각만 가지고 사회를 살아가려 그러는 건지, 내가 꽉 막힌 인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한 번 사는 인생 하기 싫은 건 안 한다고 손사래를 치었다. 자존심만 가득했고 성질대로만 살아온 것이겠지. 

 그리고 조금은 부끄러웠다. 기사에 대한 이런 내 안일한 태도와 자세 가지고 어디 나가서 당당하게 기자라고 말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떳떳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로 감염돼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기자를 하면 되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이어간다 하더라도 다른 일부 선배들처럼 사회에 도움 하나도 되지 않은 인간들로 나락하기 일쑤일 것이다. 그러기엔 내 부모님과 나 자신, 그리고 추후 내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인간들로 비칠 것이 분명하다.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조금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지만 오히려 성장이 묻어있지 않은 그들로 인해 나는 그 조직의 자리가 끔찍이 더 싫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들과 닮아지고 싶지 않은 나만의 본능들로 인해 얼른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까지 겹쳐 내 생각의 방향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와 성질이 비슷한 어떤 선배는 남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말해주기도 했다. 소신이 밥 먹여주냐며. 우리가 소신 챙겨봤자 뭐 달라는 거 봤냐고.  

 소신이라. 그럴싸하게 포장하면 소신이라는 단어도 어울릴 수 있겠지만 그동안 가깝게 생각해왔던 단어는 아니었다. 소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어떤 자존심이라고 해야 어울렸고 어쩌면 허세와 겉멋이 몸과 정신을 지배한 것일지도. 큰일이야. 이놈의 사회부적응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그래도 자기 전에 미래라도 한 번 그려봐야겠지. 

 불투명한 내 미래의 길을 생각하면 머리 아팠지만 그래도 위안 삼은 건 머릿속에 그려진 길이 많았고 그 뜻은 선택지가 많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배달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겠다는 생각부터 어떻게든 먹고살겠지라는 간단한 마음을 가지고 나니 한결 마음이 평온해졌다. 

 혼자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으니 갑자기 윗선 중 한 명에게 연락이 왔다. 내 심정에 대한 소문을 들은 건지 또 무슨 따분한 설교를 이어가시려고 그러나 귀찮은 생각뿐이었지만 이 사람 전화를 매번 일부러 안 받은 것도 미안해서 마지막 통화라 생각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쉬고 있었지? 지금 협회에서 연락 왔는데 이번에 그 기사, 기자상 받기로 결정 났어. 축하해. 얼른 쉬어.”

 내가 고의적으로 항상 전화를 안 받는 걸 알고 있었는지 그 사람은 전달사항만 대충 얼버무리고 곧바로 통화를 마무리지었다. 축하 전화였지만 업무 지시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잠시 뒤 휴대폰을 다시 확인해보니 부서 단톡방에는 데스크의 축하 메시지가 와있었고 취재팀 전원이 상을 받는 것이라 데스크 본인을 포함해 모든 부서원이 뿌듯해 보였지. 질투심 가득한 한 사람은 빼고.

 며칠 뒤 가진 시상식에서는 상금과 상패를 전달하는 자리를 가졌다. 부장을 포함해 국장까지 자리에 함께했고 단체 사진까지 찍기도 했다. 그날 찍은 사진이 다음날 지면 한가운데 실렸는데 나는 사진 속에서 내 얼굴을 찾아내고는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했다. 처음에는 지면 사진이 깨진 것인지 의심돼 인터넷으로 올라온 기사 사진을 다시 들춰봤는데 화질이 선명한 인터넷에는 그동안 봐오지 않았던 내 얼굴이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날 외근을 나오자마자 내 휴대폰에 있는 지난 사진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내 얼굴이 조금씩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미 짐작은 갔었지만. 

 사진을 통한 얼굴의 변화로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20대 초반 군 전역할 당시만 해도 사진 속에는 세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청년이 미소를 짓고 있었고 혼자 일본에 있던 시절의 사진만 봐도 얼굴에 옅은 어둠조차 없었다. 그때 그 시절만큼은 지금보다 철이 없었으면 없었지 우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던 감정임은 분명해 보였지. 대학 때의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진이 술자리에서 찍은 사진들뿐이었지만 사진 찍을 때마다 억지로 짓는 웃음이 아닌 마냥 그 시간이 행복해서 짓는 웃음으로 내 얼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내 미소를 좋아하던 시절이었겠지.

 아마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TV를 보면서 깔깔대고 있는 내게 엄마는 넌지시 말했다. 너는 어렸을 때 보조개가 없었는데 매일 웃다 보니 그렇게 보조개가 생겼다고. 넌 보조개가 예쁘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많이 웃으라고. 그 이후 지금까지 누군가가 내 미소와 보조개를 칭찬해줄 때마다 엄마의 말을 한 번씩 더 되새기곤 한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와서 역시 내 궁극적인 문제는 사진의 개수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최근 사진첩을 뒤져보니 지난 1년간 내가 담겨있는 사진은 3장뿐이었고 그 사진만 보더라도 어느새 망가져있는 내 표정이 덩그러니 화면 속에 있었다. 3장 중 가장 오래된 10개월 전의 사진은 동기들과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나마 어색한 미소가 조금이나마 숨겨져 있었고 6개월 전의 사진은 선배의 생일 파티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때부터는 죽은 시체처럼 얼굴에 생기를 전혀 볼 수 없었다. 사진을 찍었던 당시를 회상해보니 이때부터 일이 재미없기 시작할 때였고 가장 최근 사진인 2개월 전 부서 회식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우울증 말기 환자처럼 동공에 힘이 풀린 한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지.

 간혹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중에서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단순히 숙취에 절어 있거나 건넬 말이 없어서 하는 별 의미 없는 말들인 줄 알았지만 지나온 시간 동안 내 신체는 은연중 조금씩 더 빨리 죽어가고 있던 것일지도. 내 정신적인 부분들도 이미 하나 둘 죽어가고 있었을 테니까. 

 세상에 애정도 없고 그렇다고 미련도 없이 어떠한 무감정 상태에 도달한 시기부터는 네 인생을 살며 행복을 찾아라, 젊음은 그 자체로 행복이라는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인생에서 행복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미디어나 책들의 두서없는 행복 찬양을 볼 때마다 나는 저런 유치하고 진부한 말장난들을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냐는 반항아 기질을 보이며 냉소적인 인간이 되어있기도 했다. 그렇게 행복을 적대시하는 인간이 되어있으니 내 미소를 선명하게 그리는 방법도 서서히 잊어버렸겠지. 그리고선 내가 사랑하고 있던 내 예전의 모습들도 잃어버리고 있던 것이겠지. 요즘 시대에 무슨 행복 타령이냐는 생각들을 하며 서른이 넘어간 와중에도 중2병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러던 찰나에 지면에 있는 사진 속 내 표정을 다시 보며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란 인간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 인간이란 것을. 이제는 한 발짝 물러나 세상을 아니꼽게 보는 습관은 잠깐 양보하고 나서 또 한 가지 깨달은 건 내가 일을 즐기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왜 일을 잘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있는 조직을 왜 성장시키고 싶어 하는지 직업을 통해 가지는 만족감과 성취감 같은 모든 것들이 결국 행복이라는 큰 틀에서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출근길이었지만 나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갓길에 차를 세웠고 휴대폰을 꺼내 부장에게 연락했다. 

 “부장. 이제 일이 재미없어요. 그만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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