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에 발을 들이고 나서는 내가 지니고 있던 감정을 소홀히 여기기 시작했다. 만족감이라든지 설렘 같은 긍정적인 감정과 불편함, 외로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까지. 평소 내 감정들이 이루는 삶이라는 소중하고 거대한 나무에 애정과 관심의 물을 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행복이라는 열매가 나오길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행복의 뜻과 범위도 모르면서. 어쩌면 매일 보이고 들리는 행복찬양에 나도 줏대 없이 끌려가던 것일지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내 감정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모르고 달려가면 어느 순간부터 내 영혼이 조금씩 희미해진다고나 할까. 단순히 무감각하고 무지의 인간으로의 변모라면 인간 각자마다 가지고 있는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고민하지도 않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무기력하고 우울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아를 거울 속에서 발견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한 게. 과거의 흔적들 속에서는 간혹 나 자신을 좋아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건 분명히 거북한 신호였다.
사회초년생이라는 선고는 내게도 가슴 뛰게 하는 초대였다.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준비돼있었으니까. 거창한 각오까지 남몰래 담고 있었지. 우주 속에서 어슬렁거리는 티끌 같은 존재가 세상을 뒤흔들어버리겠다는. 젊음은 이렇게 대책 없이 당당하고 날뛰는 행위들이 유일하게 용서될 수 있는 도구니까. 내 안에서도 남들과 똑같이 많은 생각들과 상상들이 일렁였다. 하지만 내가 맞닥뜨린 사회는 모든 생활들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이 단지 사회 속 집단에서의 적응이라는 점에 불과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이 나라에서의 세대차이가 왜 서로를 적대시하는 세대 구분으로 되어가고 있는지 실루엣을 보고 말았다. 기대하고 어쩌면 우러러까지 보았던 이 나라 사회의 모습들은 과거의 안 좋은 습관들을 노력해서라도 답습하려는 모습들로도 느껴졌으니까. 마치 사회 속 모든 행위들이 그 세대들만의 자부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꼽으라면 젊은 세대들의 항변을 노래하고 싶었을 뿐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노력과 끈기가 부족하다는 대표적 이론으로 퇴사와 취업 그리고 넓은 범위에는 입시라는 장르까지 단번에 사회현상들을 증명하려는 기성세대의 가치관도 그 나름대로 존중하지만 이 모든 문제들은 단순히 한 인간의 노력과 인내 같은 것들로 치부되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내 퇴사의 경우에는 5년 뒤, 10년 뒤 그리고 20년 뒤까지의 내 모습을 그려보았을 때 회사에서 매일 마주치는 배울 점 없고 성숙해지지 않는 기성세대 누군가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나는 그게 가장 소름 끼치게 두려웠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삶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안주의 삶보다는 매일 발전적인 세계를 그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모든 삶은 고귀하다는 그런 고지식한 말들을 내뱉으면 할 말 없지만.
내 삶의 방향을 위해서 퇴사를 결정하긴 했지만 글을 쓰면서 다시 많은 일들을 떠올리고 보니 그래도 사회생활이라는 현실과 경험에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게 해 주기도 한 일종의 감사와 내가 있는 이곳은 어떤 사회를 추구하는지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게 전부 섞여 있었겠지.
이 글을 마치고선 나는 곧바로 내가 그린 세계의 곳곳을 다시 손질해야 한다. 여전히 밑그림뿐이니까. 색감을 찾아야 하고 섬세한 수정 작업도 필요하겠지. 이런 식으로 조금씩. 내일이 오늘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면 그거면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