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게 넘쳐나는 건 축 처진 옆구리 살과 시간뿐이겠다, 커피 한잔을 따라놓고 앞으로 배우고 싶은 것들을 노트에 하나 둘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계획만 하고 실천조차 하지 않았던 지난 수차례의 전적들을 통해 증명됐기에 당장 실현 가능성 있는 것들로만 최대한 추려냈다. 그렇게 추려낸 이번 계획 중에서도 그동안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에만 머무는 계획들이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 또 그동안 그랬듯이 이번엔 조금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가지면서.
먼저 ‘그림 배우기’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다음 ‘영어회화 배우기’, ‘바리스타학원 등록(커피 공부)’, ‘드라마 작가 수업’ 등 예상대로 굉장히 거창하고 야심차기까지 한 내 학구열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매번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할 때면 남들 하는 거 다 따라 하고 싶고, 그러다 재능이라도 하나 얻어걸렸으면 하는 마음에 처음부터 강불로 화력을 키우지만, 몇 달만 있으면 아니 몇 주만 있으면 그 불씨는 점차 시들시들해진다.
지난 과거를 살짝만 돌아보더라도 나란 인간이 배움에 있어서 온도차가 얼마나 극심한지 알 수 있다. 20대 초반에는 혼자 장사하고 싶은 마음에 요리학원을 석 달간 다녔지만,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는 요리에 대한 열정이 급격하게 식었고 그 이후에는 컴퓨터학원, 영어학원, 피아노 학원, 수영 학원까지 매번 같은 방식으로 나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르주 퐁피두 전 프랑스 대통령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는 것, 외국어 하나 정도는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 등 문화의식을 기본으로 총 6가지를 통해 중산층을 정의했는데, 어쩌면 나도 중산층으로 보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무엇이든지 간에 쉽게 빠지는 내 모습을 보며 나란 인간이 매 순간 열정적이고, 많은 분야를 경험하고 싶어 하는 ‘뜨거운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 뜨거운 온도의 의미는 그래도 매사에 적극적인 인간으로 비추어 볼 수 있으니 긍정적인 해석이 다분히 담긴 것인데, 그렇다 보니 열정이 금방 식어버리더라도 타오르는 순간순간에 의미를 두곤 했다. 맞다. 합리화의 결정판이다.
그렇게 타오르고 식어버리는 삶을 수년째 반복하고 나니, 이제는 반대되는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혹시 내가 뜨거운 인간이 아닌 차가운 인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불현듯 떠올리면서 나란 인간의 그 얼음장 같은 특성 때문에 뜨거운 열정들을 쉽게 식혀버리는 건지 고민에 빠졌다. 쓸데없는 고민들이지만, 완성되지 않은 인간의 본모습을 더 늙어서 맞닥뜨리기는 싫었기 때문에 내 이기적인 모습들과 게으른 모습들까지 최대한 내 안의 안 좋은 본성들을 파악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남은 인생은 성숙한 어른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야무진 꿈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로 가득 찼을 무렵, 내 생각들을 매번 정리해주는 정신과 쌤은 그런 생각도 좋지만, 먼저 내 생각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정해주었다.
“그런 생각들을 통해 본인을 분명하게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본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연습 먼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쌤은 지난 숙제를 계속 못하고 있는 학생을 달래듯이 말했다.
“두 달째 말씀하시니, 이제 그래야 된다는 건 알겠는데 사실 그 연습은 어떻게 하는 건지 참 어렵네요. 쌤 말씀대로 저는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니 성격도 참 까다로운 인간인가 봐요” 평소 같았으면 ‘이번 주도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계획된 약속을 말하겠지만, 어느새 정신과 상담마저 따분해졌나 보다.
“나를 아끼는 연습을 조금씩 해보는 건 어떨까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본인에게 하루 한 끼 정도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거나 나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운동을 하거나 말이죠”
그 이후부터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느낌으로 하루하루 남들의 일상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아침을 챙겨 먹기 시작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억지로라도 생각해 정성을 들여 요리를 해보기도 하고, 햇빛을 받으며 산책을 하기도 하고, 처방받은 약을 조금씩 줄여보기도 하고. 예전처럼 사람들을 잘 만날 것이라는 상상도 하면서.
"그래... 지금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에 대한 애정이 필요한 시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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