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실에는 누가 봐도 서울대 출신인 걸 알 수 있듯이 환자들의 시선 정면에 서울대 마크가 크게 붙어있는 가운이 걸려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은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었는데, 수차례 검색해서 내가 두 번째로 찾아간 정신과는 첫 이미지부터 19세기의 유럽 성당 같은 고전적인 인테리어가 맘에 들었다.
아, 첫 번째로 찾아간 정신과는 원장과 직원들의 기본적인 대응이 불친절해서 약을 처방받고는 그 이후 발걸음을 돌렸다. 간혹 살다 보면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서비스업의 불친절인데, 제삼자가 보기에도 불편했다. 환자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를 치거나, 기본적으로 예의 없는 말투, 나를 진료하던 원장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험담을 하며 쓸데없는 얘기까지... 이런 쪽으로는 내게도 숱한 경험이 있기에 ‘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면 저러겠어’하는 아주 선한 아량을 베풀 때도 있지만, 가끔은 이렇게 급발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급발진할 때면 온갖 정성을 쏟아버린다.
그 병원이 어떤 대응 방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원장이 환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어떤 점이 문제점이었는지 홈페이지에 아주 상세하게 A4 3장 분량을 적고, 평점을 테러했다. 이러면 더 나은 서비스가 될 것이고 결국엔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거론하고, 의료업의 친절 의무 규정을 거들며. 원래 배우지 않은 사람이 배운 티 내는 건 잘한다. 그러자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 병원의 대표원장이었다.
“대표 원장으로서 정말 죄송합니다. 직원 교육을 다시 시키도록 하겠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굽실대는 대표원장의 말을 듣고선 ‘네가 뭔 잘못이겠니. 직원들 잘못이지’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뭘 이제 와서 잘해. 바빠요”
황급히 끊어버리던 찰나에 휴대폰 너머로 ‘올리신 글...’이라는 말이 들리기도 했다. 아마 글을 내려달라는 부탁이었겠지. 그 병원이 앞으로 더 잘되기 위해선 이제 직원 교육 개념으로 내리 갈굼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첫 정신과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래도 당장 약이 빨리 필요했기 때문에 다음 병원을 찾았다. 이번엔 블로그와 평점, 분위기, 원장 관상까지 철두철미한 검색을 통해 동네에 있는 한 정신과가 눈에 들어왔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단순히 오래만 다닐 수 있는 정신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다행히 새로운 정신과는 입구에 들어갈 때부터 두 명의 직원들이 상당히 능숙한 친절로 나를 대응했다. 순간 ‘뭐야. 내가 쓴 글이 정신과 사이에서 소문난 거 아니야?’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친절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부러 사람들이 없을 시간에 방문했는데도 대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20분 정도 대기했을까. 이름이 호명되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복도 끝에 있는 원장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젊은 분이시네요” 원장이 입고 있는 가운에 이름 석자가 쓰여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성함이었다. 분위기를 유하게 풀어볼 겸 TMI를 원장에게 말하려다 그러면 원장은 ‘아. 예’하고 대화는 단절되겠지.
“안녕하세요. 요즘 젊은 사람들 상담이 많은가 보죠?”
“그렇네요. 확실히 예전보다 20대, 30대 분들이 많이 내원하시네요. 자, 그럼 저희 얘기를 해보죠. 어떻게 오셨을까요?”
약이 필요하다고 얘기해야 되는지, 자기소개를 해야 되는지 헷갈렸지만, 정신을 차리고 구체적인 증상을 먼저 얘기했다.
“술에 의존해서 우울해지고 대인기피증이 생기는 건지, 아니면 우울해지고 대인기피증이 생겨서 술을 찾는 건지 모르겠어요. 한 5개월 전쯤부터 이랬고, 그럴 때마다 매일 술을 마시고 있는데, 증상은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요”
원장은 내 말의 한 글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른 타이핑을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는 따로 없으시고요?”
“음.... 먼저 일이 재미없어진 게 이유로는 가장 큰 것 같고요. 그 상황에서 계속 일을 억지로 한다는 느낌이 드니까 제 안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러면 그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이게 계속 반복되는 상황이에요” 얘기를 하다 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고는 내 직업과 결혼 유무 여부도 간단히 말했다.
“혹시 죽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신 경우도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 생각은 안 하려고 해요”
“그럼 술은 일주일에 몇 번 드시나요?” 원장은 계속해서 타이핑을 치다가 멈추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온전히 직장에서 마시는 술은 일주일에 7번 정도 되는 것 같고, 자의로 마시는 건 5번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점심과 저녁 포함해서요.”
“하.....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정상적인 생활 같으신가요?” 연기를 잘하는 건지 진심인 건지 나를 바라보던 원장은 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러네요. 다시 계산해보니까 엉망이네요.”
“일단 좀 자세한 걸 알기 위해서는 검사할 게 있어요. 쉽게 말씀드리면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관련 종합 검사인데, 교감신경활성도, 자율신경계 균형도, 스트레스 저항력까지 검사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가시면 설문지 작성도 안내해주실 텐데 그거까지 다 마무리 지으시면 다음 주쯤? 검사 결과 나올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성미 급한 성질대로 서둘러 자리를 일어나려 할 때 원장은 나를 붙잡고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근데요...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자면, 앞으로 술 끊으셔야 돼요.” 원장의 단호한 이 말 한마디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대답을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저도 꼭 그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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