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지만 침묵하지 않는 협주곡

정원선 시인의 <마네킹 협주곡>

by 김승하


마네킹4.png

얼마 전 남편을 잃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초로의 여자를 대형 아울렛 매장에서 우연히 보았다

남자 셔츠를 입은 마네킹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여자를-

셔츠를 보고 있는 건지

마네킹을 보고 있는 건지

남편이 그리운 건지, 야속한 건지

구분이 잘 안 가는 한 여자를-


그러다가 그녀가 바로 앞의 마네킹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네킹이 오히려 피곤한 기색을 띠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심전심으로 서로가

유체이탈로 넘나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 또한 이 변화에 동참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손에 든 바지를 가리키며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

바지 많잖아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그 여자를 쳐다본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한 여자를-


가족밖에 모르는 아내도

훗날에 저러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주위의 마네킹들이 내 분신 같기도 하고 오랜 친구 같기만 한 것이다.

시: 정원선 시인,달아실시선 92,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에서



고요하지만 침묵하지 않는 협주곡


오늘은 정원선 시인이 보내 준 달아실 출판사의 달아실 시선 92번째 시집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에 실린 시편들 가운데 「마네킹 협주곡」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네킹 협주곡」은 일상의 순간에 스며든 죽음, 상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공허를 은유적으로 포착한 시입니다. 이 시는 ‘마네킹’이라는 움직이지 않는 물체의 이미지를 통해 살아 있는 인간의 내면을 다시 비춰주고, 감정과 사물,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섬세한 심리적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원선 시인은 ‘마네킹’이라는 이미지의 중의성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마네킹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감정도, 온기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마네킹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상실한 인간의 심리 상태, 주인공의 잠재적 공감과 동일시의 대상, 노년의 상처받은 감정이 이입되는 매개체로 기능합니다.


“남자 셔츠를 입은 마네킹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여자를–/셔츠를 보고 있는 건지 / 마네킹을 보고 있는 건지 / 남편이 그리운 건지…” 이 구절은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 감각과 감정이 뒤엉키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이미 상실의 시간을 통과한 여인이 셔츠를 입은 마네킹의 모습을 보며 남편을 떠올리는 그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 기억과 현재가 교차하는 심리의 연주가 시작됩니다.


그러다 그녀가 마치 마네킹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대목에서, 화자의 인식은 반전됩니다. 여인은 점차 고정된 대상,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고, 반대로 마네킹은 감정을 가진 듯한 피로한 기색을 드러냅니다. 이 존재의 뒤바뀜은 단순한 공감의 단계가 아니라,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자의 무의식적 유체이탈, 경계가 무너지는 상태를 그려냅니다. 화자의 시선은 결국 ‘그녀’를 향한 관찰을 넘어서, 자신의 내면과 존재를 향한 투사로 확장됩니다. 죽음 앞에서 누구나 마네킹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시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정원선 시인은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무심한 일상의 장면 속에서도 감정의 진폭을 섬세히 조율합니다. 시의 화법은 담담하고 산문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역설적 긴장이 숨어 있습니다. 화자는 아내의 말에 “바지 많잖아”라며 건성으로 반응하지만, “다시 그 여자를 쳐다본다 /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한 여자를—”로 이어지며 내면의 흔들림을 감추지 못합니다. 이러한 심리의 진폭은 한 편의 협주곡처럼 미세한 리듬과 층위를 이루고 있으며, “아내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 또한 이 변화에 동참했을지도 모른다"라는 고백을 통해, 화자 스스로도 마네킹처럼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마네킹 협주곡」은 ‘그녀 → 아내 → 나 → 마네킹’의 이미지 전이를 통해 공감의 확장을 시도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모든 시선을 주변의 마네킹들로 확장하며 “주위의 마네킹들이 내 분신 같기도 하고 오랜 친구 같기만 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철학적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살아 있는 유기체인가, 아니면 감정을 잃고 반복되는 일상 속을 무감각하게 떠도는 마네킹인가. 시인은 타인의 상실을 보며 공감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삶의 정지된 감각을 직시합니다.


결국 정원선 시인의 「마네킹 협주곡」은 ‘움직이지 않는 것’ 속에 숨겨진 감정의 진동을, ‘무표정한 형상’ 속에서 울려 퍼지는 삶의 여운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침묵과 무감각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묻는 이 시는, 고요하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는 하나의 협주곡입니다. 불현듯 금강경의 구절,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이 떠오릅니다. 감정의 표면을 넘어 진여의 고요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들어가려는 정서적 여운이, 이 시를 더욱 깊은 침묵의 음악으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2025.06.30./김승하/kimseon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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