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문 바다에 길을 물어/김승하

오늘의 시낭송

by 김승하

https://youtube.com/shorts/1ynJJY-rFcQ?si=YpXwlqoWqSXC3-ld

저문바다16.png

마른 풀잎 붉게 타오르던, 노을 속

먼 마을의 풍경 잿빛으로 식어가고

바다는 저 홀로 깊어 잠이 드는가.

뒤돌아보면 마음보다 먼저 달려간

인동忍冬덩굴 자주 발목 잡는

옛 마을 이르는 길 지워져 보이지 않고

깜박이는 불빛들, 뭇별 하나 당겨 모닥불 지핀다.

때로 잠든 바다도 깨어 흔들리는

자성自省의 밤은 더디 가고

무엇으로 남아 오래도록 타오를 수 있으랴

이승의 경계 넘어오는 바람 소리

문득, 저문 잎새마다 귀를 세우고

반딧불 몇 개 밝히는 외로움이여

마른 솔가리와 삭정이를 모아

부싯돌 같은 마른 가슴 다시 불꽃을 지핀다.

매운 연기 타고 흩어지는 그리움.

하루살이 떼 슬픔은 재가 되어 날리는가

조각조각 흩어진 소나무 껍질을 밟으면

바스러지는 침묵 속, 솔방울로 떨어진 기억들

차고 낮은 파도 소리 섞여

환청으로 떠도는 여린 거문고 소리

저 홀로 가던 길 끊어져 보이지 않고

재 속에 묻힌 깜부기불 몇 개

다문다문 떠오르는 어화의 불빛들

빈우지궁牝牛之宮의 별자리를 따라 떠도는 별

오래도록 호명呼名하는 그리움 뒤채이며

산문山門에 두고 온 마음 따라와 잠이 드는가.

시: 달아실 시선09,김승하,<저문 바다에 길을 물어>



「슬픔의 계보학」 중에서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의 해설


김승하의 시들은 인간 삶의 가장 큰 공분모가 슬픔이라는 사실을 환기하게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죄다 슬픈 짐승들이다. 슬픈 존재는' 약한' 존재이므로, 우리는 모두 약한 존재들인 셈이다. 시가 존재의 약하고 슬픈 이면을 건드릴 때, 가장 큰 공명이 일어난다. 인간은 슬픔의 종소리에 가장 넓고 깊게 공명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슬픔이 있기 때문이고, 슬픔이야말로 약한 자들이 공유한 가장 큰 울림이기 때문이다. 기쁨은 때로 질투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슬픔은 오로지 슬픔만 불러 모은다. 슬픔의 동지들이 함께 슬퍼할 때, 모처럼 인간들은 제대로 된 인간들로 태어난다. 슬픔은 선성善性안에서 발효되고, 사랑과 자비와 겸허를 불러온다. 허구한 날 싸우던 인간들이 슬픔 안에서 비로소 하나 되고, 함께 무릎 꿇는다. 그러므로 슬픔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훌륭한 기제이다. 그리하여 데리다(J. Derrida)는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였다. 슬픔 앞에서 슬퍼할 줄 모르는 자는 비非존재이다. 슬픔이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 사랑이 없는 자는 슬퍼하지도 애도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존재의 특권이다.



「저문 바다에 길을 물어」 시작 노트


슬픔을 극복하려 애쓰지 말자. 슬픔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겐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너무 쉽게 슬픔을 떨쳐 버리려고도 하지 말자. 우리는 슬픔을 슬퍼할 수 있을 때 나를 돌아 볼 수 있다. 우리는 기쁨이라는 투명한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 보다 슬픔이라는 흐린 배경으로 얼룩진 거울에 나를 비출 때 더욱 뚜렷하게 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삶의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해 가는 과정이 인생이다. 슬픔은 내가 존재하고, 삶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한 계속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허무하고 아픈 것인 까닭에 종종 우리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존재의 순간들이 비존재의 순간들에 묻혀버리거나, 자신의 존재를 잊고 비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삶의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 존재이지만, 그 존재의 여행 끝에서 만나는 것이 죽음이고, 존재의 상실이 슬픔이다. 슬픔은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과정의 근원적 결핍감에서 비롯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고, 인간은 공간과 시간 속을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간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세상과 나의 관계 속에서 슬픔으로 나를 돌아보는 그것이야말로 나를 제대로 발견하는 가장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나를 제대로 헤아려야 세상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상처를 바로 보고 치유할 수 있어야 남의 상처도 보듬어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사랑이나 詩며 문학이라는 것도 내 안의 슬픔이라는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고 읽어가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한때 바다를 보며 그 슬픔의 거울에 비친 나를 오래도록 지켜본 적이 있다. 언젠가 나는 전국 사찰 순례를 마친 뒤, 동해의 어느 바닷가에서 밤바다의 파도 소리에 젖어 잠을 뒤척인 적이 있었다. 삶과 죽음, 사랑과 슬픔, 시와 문학 등을 떠올리며 山門에 두고 온 마음을 밤새도록 뒤척인 경험이 있었다. 그 무렵 쓴 詩가 <저문 바다에 길을 물어>이다. 김승하 /kimseonbi

keyword
작가의 이전글즐거운 편지/황동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