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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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姿勢)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시: 민음사, 황동규시선, 「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 시인은 한국 현대시에서 ‘고요한 깊이’의 미학을 완성한 시인으로 평가받습니다.
시의 외연이 팽창하며 서사성과 현실참여가 부각되던 시대에도 그는 늘 인간 존재의 내면과 삶의 흐름을 껴안는 시 정신을 지켜왔습니다.
그의 등단작이기도 한 「즐거운 편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다림’이라는 조용한 자세로 그려낸 대표적인 서정시입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라는 첫 구절처럼, 이 시는 과장 없이 담백하게, 그러나 깊은 진심으로 사랑을 말합니다.
그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라, 존재를 감싸 안는 삶의 한 방식이며, 사랑의 끝마저도 받아들이는 성숙하고 겸허한 마음의 언어입니다.
황동규의 시는 삶을 일깨우는 편지이자, 지나온 시간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입니다. 1958년 등단작인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즐거운 편지」는 화려하거나 극적인 감정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매일 스쳐가는 사소한 풍경 속에서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는 진실한 순간들을 고요히 품어냅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때론 우리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닿습니다. 과장되지 않은 목소리로,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이 시를 전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는 일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자연의 일처럼 평범하고 사소한 일일 수 있지만, 그 평범함이 쌓여 어느 날 누군가의 괴로움에 다가가 줄 수 있는 위로가 된다는 시적 통찰이 돋보입니다.
사랑은 격렬한 감정이 아니라, 묵묵한 기억과 존재감, 오래도록 반복되는 ‘사소함’으로 남아 타인을 부르는 일입니다.
‘사랑을 기다림으로 바꾸었다’는 표현은, 단지 감정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인내와 신뢰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눈이 퍼붓는 장면은 사랑의 고통 혹은 외로움을 상징하며,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는 구절은 그 사랑이 언젠가 끝나리라는 담담한 체념 혹은 수용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시인이 진정 바라보는 것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 그 끝을 향해 가는 기다림의 자세,즉, 그 사랑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견뎌내는가입니다. 자연의 순환 ― 눈, 꽃, 낙엽, 다시 눈 ―그 기다림 속에 담긴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변화, 그리고 사랑의 무상함과 반복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즐거운 편지」는 격정적이거나 소유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조용히 스며드는 사랑을 노래합니다. 기다림을 통해 사랑의 지속성과 내면의 성장을 보여주는 점에서 이 시는 한국 현대시 서정적 미학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2025.06.011. 김승하, kimseon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