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의 입술로 차가운 얼음의 심장에 키스를 하다

파블로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by 김승하


국내에 소개된 많은 외국 시인들의 시집을 읽어보았지만 감동이 있는 작품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특히 번역상의 문제점으로 인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와중에 내가 30년 전 우연히 알게 된 한 권의 시집- 파블로 네루다의<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 민음사, 정현종 시인 번역-은 내가 읽어 본 많은 번역 시집 중에 가장 감동을 많이 준 시집이었다.

네루다의 시는 한마디로 뜨거운 불의 입술로 차가운 얼음의 심장에 키스를 퍼붓는 것과 같은 정열과 고독의 이미지가 넘치는 시들로 가득하다. 그는 고등학생인 1920년 16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이미 19세 때 오늘날 남미 전역에서 사랑받는 시집<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라는 시집을 출간 [한 여자의 육체],[나는 기억한다. 그 최후의 가을에],[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등을 발표한다. 그의 첫 시집이 1923년 발표되었다.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제일 슬픈 구절을.

예컨대 이렇게 쓴다."밤은 산산이 부서지고 푸른 별들은 멀리서 떨고 있다"

밤바람은 공중에서 선회하며 노래한다.

오늘 밤 나는 제일 슬픈 구절을 쓸 수 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중략.....

나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그건 그렇지만, 허나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잊음은 그렇게도 길다.

이런 밤이면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으므로

내 영혼은 그녀를 잃어버린 게 못마땅하다.

비록 이게 그녀가 나한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그리고 그게 그녀를 위해 쓰는 내 마지막 시일지라도.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네루다는 첫 번째 시집 출간 이후 23세 때 시인으로 인정받아 극동 주재 영사로 버마, 타일랜드, 중국, 일본, 인도, 등지에서 살며 아주 외롭고 고립된 생활을 보내게 되며 이 시기에 시인은 [죽음만이],[산보],[혼자 사는 남자][망각은 없다(소나타)]등의 작품이 실린 <이 땅에 살기>1.2권 등 많은 시들을 쓰게 되며 1932년 남미로 돌아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로 재직 시절 시집<이 땅에 살기 1>을 1933년 출간 후 1942년 스페인으로 발령받는다. 이 시기에 그는 스페인의 많은 초현실주의 시인들 사귀게 되어 그의 작품[죽음만이]에서처럼 초현실적인 요소를 가미하게 되어 1935년<이 땅에 살기 2>가 간행된다.

...중략...

발이 들어 있지 않은 구두처럼, 사람이 들어 있지 않은 옷처럼,

죽음 은 그 모든 소리에 섞여서 온다.

와서 노크한다. 보석 안 박은 반지, 손가락이 들어 있지 않은 반지로,

와서 소리 지른다, 입 없는, 혀 없는 목구멍으로,

발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도

옷 스치는 소리가, 나무에서 나듯, 쉿-하고 난다.... 중략

-[죽음만이]


나더러 어디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라고 말할밖에 없다.

돌들로 이루어진 땅이라든가

살아 흐르면서 스스로를 망가뜨린 강에 대해 말할밖에;

나는 다만 새들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알고,

우리 뒤에 멀리 있는 바다에 대해,

또는 울고 있는 내 누이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중략....

나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가진 것들 얘기부터 할밖에 없다.

참 쓰라림도 많은 부엌세간,

흔히 썩어버린 동물들,

그리고 내 무거운 영혼 얘기부터.

만나고 엇갈린 게 기억이 아니다,

망각 속에 잠든 노란 비둘기도;

허나 그건 눈물 젖은 얼굴들,

목에 댄 손가락들

,... 중략....

허나 이빨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침묵을 싸고 자라나는 껍질을 잠식하지도 말자,

왜냐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죽은 사람이 참 많고

붉은 태양이 갈라놓는 바다 제방이 참 많고

배들이 치는 머리들이 참 많으며,

키스하며 몸을 감는 손들이 참 많고,

내가 잊고 싶은 게 참 많으니까.

-[망각은 없다(소나타)]

1936년 네루다는 스페인의 프랑코가 북아프리카를 침공하자 영사로서는 월권 행사에 속하는 선언, 칠레는 인민정부의 편임을 즉각 천명하여 영사직을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후 그는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스페인 망명자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하면서 브르통, 바예흐, 등 프랑스 시인들의 영향으로 심한 정치적 성향을 띠게 된다.

그 후 1948년 칠레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익의 곤잘레스 비델라가 독재자로 권력을 잡게 된다. 6개월 뒤, 비델라는 네루다를 반역죄로 몰았지만, 그는 망명길에 오르지 않고 지하로 숨어들었으며, 광부들과 노동자들이 그의 생명을 구해주게 된다. 그러나 밤마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던 네루다는 마침내 안데스산맥을 넘어 멕시코로 간 뒤, 다시 파리로 가게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는 새로운 시집, <온갖 노래>를 쓰게 되었고, 1950년 멕시코에서 [젊음],[시인],[독재자들],[카라카스에 있는 미겔 오테로 실바에게 보내는 편지]등이 실린 <온갖 노래> 초판을 출간한다.

...중략.....

시를 쓰며, 우리는 맹수들 속에서 살고 있어,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가 믿었던 어떤 사람의 내용물을 건드리면,

석은 파이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려,

당신은 베네수엘라에서, 구제받을 수 있는 건 무엇이나

긁어모아지니라고, 나는 내 두 손으로

타오르는 삶의 석탄을 감쌀 테니.

......중략.....

결국 나를 모욕하기에 이르렀으며

경찰력으로 하여금 나를 체포하도록 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주로 형이상학적 주제에 매달리는 걸 계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허나 나는 기쁨을 내 옆으로 가져왔어.

그때부터 나는 바닷새들이 먼 데서 가져오는

편지를 읽으려 일어나기 시작했지

,.... 중략....

그리고 당신의 그 짧은 시 한 편이 문득

자줏빛 꽃처럼 내 입속에서 타올랐어

.....중략.....

-[카리카스에 있는 미겔 오테르에게 보내는 편지]

네루다는 칠레의 한 소도읍에서 철도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네루다가 소년일 때 기차에서 떨어져 피살되어 죽었으며, 시인은-우리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비가 제일 많이 오는 묘지에 묻혔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시가 현실참여와 정치적 성향을 띤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환경 영향이 컷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실에 대한 관찰적 인식은 외교관으로서의 오랜 해외 경험-버마, 태국 일본 등 영사 재직, 비밀경찰에게 쫓기며 수배자로서 숨어 살던 경험, 파리에서의 브르통 바예흐 등 프랑스 시인들의 영향, 등 삶의 경험과 함께 그의 시적 매력은 무엇보다 인간적인 모습과 남미의 문화와 전통을 초현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한 데 있다.

칠레는 현재 남미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을 이룬 나라이지만 과거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혼란의 격동기를 거친 국가이다. 특히 그의 시는 70~80년도 시절 정치적 탄압과 잦은 파업 등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공감을 주었다.

돌아가지 않는 공장이 이상해 보였다.

공장 속의 고요

두 행성 사이의 한 가닥 실이 끊어진 듯

기계와 사람 사이의

거리,

물건 만드느라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의 부재,

그리고

일도 소리도 없이 휑한 방들.

사람이 터빈의 공동(空洞)들을

저버렸을 때, 그가

불의 팔들을 잡아뜯었을 때,

그리하여 용광로의 내부 기관이 죽었을 때,

...중략....

남은 건 의미 없는 강철 조각 더미,

그리고 사람들 없는 상점들 안에 혼자 남은 공기와

쓸쓸한 기름 냄새.

그 파편 튀는 망치질이 없으니,

라미레스가 없으니,

아무것도 없었다.

엔진 덮게 외엔 아무것도

죽어버린 동력의 더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오염돼 더러운 바다 깊은 데 있는

검은 고래처럼,

갑자기 외계의 쓸쓸함 속에 잠겨버린 산맥처럼.

-<파업>

역자의 말처럼<가령 그가 노동자의 비참과 죽음을 노래할 때도,[크리스토발 미란다]에서도 보듯이, 단순한 분노나 고발을 넘어, 비록 자신은 그들과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지 않더라도, 그들의 고통에 동화하는 타고난 진정성---마음 됨됨이와 작품 됨됨이에서 아울러 오는 그 비상한 진정성이 치열하리만큼 밀도 있는 것이어서 읽는 사람을 감동케 한다.> 네루다의 시는 그가 어린 시절 외딴 집의 뒤뜰에서 담장 판자에 뚫린 구멍을 통해 방치된 황량한 풍경을 보게 되면서, 우연히 배운 커다란 교훈으로 시쓰기가 시작되었지만 그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중략...

-[시]

올해 네루다가 첫 시집을 발표한지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의 시대에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다, 다소 초현실주의적 기법과 리얼리즘이 가미된 그의 시집은 여전히 많은 문학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시집을 읽으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은 변함이 없음을 느끼게 한다. 특히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의 중동전 사태를 보면서 <전쟁>,< 파업>, <삶과 죽음> 등 인간의 광기를 다시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

네루다가 어린 시절 우연히 담장의 구멍을 통해 황량한 세상을 본 교훈으로 시심을 키운 것처럼, 내가 우연히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시가 내게 영혼의 빛을 던져 주었듯이, 불멸의 영혼으로 남아 있는 그의 시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연히 던져주는 빛이 되어 영혼의 불꽃이 되었으면 한다.

2023.11.11/김승하/kimseonbi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