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 판정을 받고 제대로 된 사회구성원이 되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또래들보다 사회적 위치인 학력, 재산, 직업 모든 게 늦을 거라 생각을 하였기에 방황도 많이 했지만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았다. 나만의 길이 있을 테니깐. 지금 내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늦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일반적으로 학창 시절을 지나 대학이나 사회생활을 한 친구들은 사회 속에서 저마다 배워야 할 것과 경험해야 할 것들을 겪으며 지내온 시간의 공백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이며 헌신하는 삶이 순수한 삶이라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이들의 순수함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도 본인의 이득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이기적이며 때론 간사한 모습도 보이니깐.
이걸 좋고 나쁨으로 보지는 않았다. 단지 아이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
그 생각이 이번 진료를 통해 크게 바뀌었다. 아이들의 순수함이란 누군가를 위하는 자기희생적인 모습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즐거워지기 시작하지. 네 시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내 즐거움은 점점 고조되어, 이윽고 네 시가 되면 이미 흥분과 초조감에 휩싸여 있게 된단다." 라며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이별을 하게 되어 눈물이 나올 것 같다는 여우에게 "그럼 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거잖아!"라고 이야기하는 어린 왕자에게 "얻은 게 있어. 황금빛 밀밭을 보면 네 머리카락이 생각날 테니까."라는 대답을 해주는 여우의 모습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아닐까 싶다.
당신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로도 기쁘고 흥분된 적이 있는가, 누군가 내 곁을 떠나거나 내가 누군가의 곁을 떠날 때 울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까지 나는 당신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에 흥분에 설레었고, 당신과 헤어짐으로 인해 눈물도 많이 흘렸다. 수백 송이의 똑같은 장미 속 나는 당신이 내 장미라는 사실에 기뻐하였지만 나는 당신에게 수백 송이 장미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 큰 상실감을 얻는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만 그 상처도 결국 사람에게 받은 사랑으로 치유가 된단 걸 알지만 지금 저는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싶어요.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못할 거 같고 기쁘지 않아요. 요 근래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요.
-누구나 고통이 오고 상처를 받지만 지금 송수영 씨처럼 힘든 일이 연속적으로 터지면 정신이 더 없거나 우울한 감정이 더 들기 쉬운데 중요한 건 그 일들로 마음이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거죠.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떤 대답이던 선생님께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나면 후련함과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용기가 함께 날 뿐.
이번 진료를 통해 먹던 ADHD약의 용량은 그대로 처방해 주시고 항우울제인 푸록틴 캅셀 이라는 약을 처방해 주셨다.
복용하던 아침약에 함께 먹으라 하시며 부작용으로 식욕감소와 졸림이 있을 수 있는데 약을 먹고 졸리면 저녁에 먹으라 이야기해 주셨다. 이번에는 3주 뒤에 보자며 인사를 나눈 뒤 진료실을 나와 처방받은 약을 받고 병원을 나왔다.
병원에 있는 동안 지금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은 항상 있어와서 이 정도의 감정으로 우울증 약을 처방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집에 계셨고 어디 다녀오냐는 물음에 정신건강의학과 가서 약을 타오는 길이라 말씀드렸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그래?'라는 아버지께 나는 그냥 평소처럼 약 타고 똑같아요.라고만 이야기했다.
아버지께 내 이야기를 다 할 수도 없고 아들이 항우울제를 처방받아왔다 하면 여러 가지로 걱정할게 뻔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