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 속에서 꽃 피웠던 시절을 그리워하는가

응원봉

토요일 새벽에 일찍 깨어, 잠이 들지 않는다. 어플에서 영화를 검색하다가, ‘화양연화’를 클릭한다. 대단원의 막이 내리고, 자막이 흐른다. “지나간 시절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왕가위 감독의 마지막 자막을 되뇌며, 화양연화를 생각해 본다. 흐르는 시간에서 어느 날 찾아온 촉촉한 물방울과 부드러운 온풍이 꽃을 피우고, 그 꽃의 문양이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이 화양연화다.

갑자기 오묘한 리듬의 사운드 트랙이 깔리고, 시장에서 아파트로 오르는 장만옥과 아파트에서 시장으로 내려가는 양조위가 마주친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외도하는 것을 확인하며 친해진다.

장만옥은 양조위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양조위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자신이 쓴 소설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열심히 읽는다. 차를 마시며, 그가 쓴 글을 평한다.

양조위가 원고료를 받은 기념으로 둘은 외식을 한다. 오묘한 리듬의 사운드 트랙이 깔리며 같은 공간에서 양조위는 이야기하고 장만옥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영락없는 부부다.

둘은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바람이 튜브의 빈 공간을 찾아 들어오듯, 그들의 마음 빈 곳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랑이 스며든다. 둘은 각자 배우자의 외도를 비난하지만, 자신들이 그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자각하며 괴로워한다.

외국으로 출장 간 장만옥의 남편이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라디오로 생일 축하 송을 신청하고, 그 노래가 흘러나온다. “꽃 같던 시절 다정한 그대” 바로 ‘화양연화’다.

양조위가 장만옥에게 싱가포르로 같이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오히려 장만옥은 남편을 따라서 싱가포르로 떠나 버린다. 홍콩에 홀로 남은 양조위는 친구와 술을 마신다.

양조위가 친구에게 옛날이야기를 한다. “우리 조상들은 비밀이 있을 때, 산에 가서 나무에 구멍을 내고 거기에 털어놓은 다음에, 진흙으로 막았대. 그럼 비밀이 나무에 갇혀서 아무도 모르는 거야.”

4년이 흘러 장만옥이 홍콩으로 귀국하고 예전에 살았던 아파트를 찾아가 양조위의 행방을 묻지만, 찾을 수 없다. 양조위도 예전 아파트를 찾지만, 장만옥의 소식은 감감무소식이다.

양조위 홀로 캄보디아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에서 양조위가 나무 구멍에 입을 대고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양조위는 사라지고, 진흙으로 메운 나무 구멍이 확대되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둘 사이의 사랑이 화양연화인 것은 양조위 쪽이다. 양조위는 먼지 쌓인 유리창을 통해서 장만옥과 사랑하던 시절을 들여다보다가, 그 유리창을 깨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심지어는 만져보고 싶어 한다.

양조위가 장만옥을 잊지 못하고 나무 구멍에 속삭이는 장면에 마음이 그윽하다. 그의 애틋한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김소월은 ‘개여울’에서 떠나간 연인에 대한 애틋함을 절절히 노래하고 있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 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딱 지금처럼 겨울의 찬 기운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는 봄기운에, 자신의 마음보다는 따스한 개여울 바닥에 주저앉아서 미련 없이 떠나간 연인이 돌아오길, 날마다 하염없이 생각하고 있는 이는 김소월일까 양조위일까?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처음 들으면, 화(華)로 인해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로 착각하기 쉽다. 우리 사회에서는 잘 쓰지 않는 한자 조합이라서, 그 뜻을 모르겠다.

‘화양’은 꽃문양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만, ‘연화’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사전을 들여다보니, 화(華)에 세월이라는 뜻이 있어서, ‘흘러가는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화양연화는 사전의 뜻에 충실하게 해석하면, ‘흘러가는 시간 중에 기억되는 꽃문양’ 정도이다.

젊은 시절에는 화려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꿈꾼다. 인생 3학년 정도에 화양연화를 처음 볼 때는 모호한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다. 외도라고 생각하니, 살짝 구리기까지 하다. 20여 년이 흐른 뒤에, 다시 보니 느낌이 정말 새롭다. 그 새로움을 그윽하게 노래한 황치훈의 ‘추억 속의 그대’를 듣는다.

희미해지는 지난 추억 속의 그 길을

이젠 다시 걸어볼 순 없다 하여도

이 내 가슴에 지워버릴 수 없는

그때 그 모든 기억들

그대의 사랑이 지나가는 자리엔

홀로 된 나의 슬픈 고독뿐

그대가 다시 올 순 없어도

지나간 추억만은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에

홀로 돌이켜본 추억은

다만 아름답던 사랑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랑에

홀로 돌이켜본 추억은

다만 아름답던 기억뿐

화양연화는 각자의 삶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해피엔딩 화양연화는 너무 기뻐서 그 당시의 감정이 휘발된다. 그래서 해피엔딩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만이 단순히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된다.

반면에 새드엔딩 화양연화는 기쁨과 슬픔의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며, 무지개를 만든다. 그 무지개는 저 멀리 아련하기만 하다. 생각날 때마다, 새드엔딩 화양연화를 꺼내면, 그 감정의 무지개는 서서히 퍼지며 주인공을 둘러싸 폐부로 스며든다.

해피엔딩 화양연화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며 자랑하고 싶지만, 새드엔딩 화양연화는 비밀로 간직하고 싶다. 이러한 새드엔딩 화양연화를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나무 구멍에 살짝 속삭인 후에, 새까맣고 두꺼운 진흙으로 메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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